일제 강점기 활동했던 '구인회' 실존 인물을 모티프로 활용
등장 인물 서사 통해 고전의 가치 전달... 게임의 예술성 재고

[게임플] 1933년 무렵 경성부청 건너편에 위치한 끽다점(喫茶店) ‘낙랑파라’를 찾는 몇 명의 문인들이 있었다.

극작가 유치진, 소설가 이태준, 시인 정지용 등 9명은 이곳에 종종 모여 함께 글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다. 크고 작은 변동은 있었지만, 늘 머릿수 9명을 채웠던 이 모임은 훗날 ‘구인회(九人會)’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다.

프로젝트 문이 서비스하는 모바일 게임 ‘림버스 컴퍼니’는 작중 인물의 이름과 서사에서 알 수 있듯 세계 문학의 요소를 여럿 차용했다. 그중에서도 지난 6월 업데이트 된 메인 스토리 4장 ‘변하지 않는’은 ‘이상’과 그가 몸담았던 ‘구인회’의 이야기를 다룬다.

게임 속 구인회는 실제 존재했던 ‘구인회’와 그 모습이 많이 닮았다. 게임은 구인회라는 이름으로 함께 모였던 문인들의 생애와 작품을 캐릭터에 담아냈다. 당대 정치적인 성격을 띠었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이하 카프)’의 문학에 반해 순수한 예술로서의 문학을 추구했던 ‘구인회’처럼, 게임 속 구인회는 기술을 독점하려는 기업의 탄압을 피해 순수한 기술 연구를 추구한 모임이다. 그 안에 인물들 역시 실제 ‘구인회’ 구성원을 모티프로 만들어졌다.

이 중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세 명의 인물, ‘동랑’, ‘동백’, 그리고 ‘이상’의 서사다. 게임은 이들의 모티프가 된 인물들이 남긴 삶의 흔적을 인물의 서사에 녹여내 하나의 장대한 비극으로 승화시켜 이를 감상하는 유저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 차가운 현실에 일그러진 꿈, ‘유치진’ 그리고 ‘동랑’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 ‘동랑’의 모티프는 극작가 유치진이다.

유치진의 호 ‘동랑(東朗)’에서 이름을 딴 그는 작중에서 대기업 소속의 유능한 과학자로 묘사된다. 구인회 소속 당시 동물을 치료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겠다던 그의 꿈은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격차가 있는 대기업의 기술력 앞에 잘못 쓰인 편지처럼 맥 없이 구겨졌다.

각자 자신만의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동료들 곁에서 무너져 버린 그는 구인회의 존재를 밀고해 구인회를 해체했다. 이후 자신을 무너뜨린 대기업에 입사해 모든 생명을 재생시키는 기술을 만들어 자신의 꿈을 이루지만, 그마저도 자신이 동경했던 이들의 발명품을 모방해 겨우 얻어낸 성과에 불과했다.

그의 모티프가 된 유치진 역시 좌절을 겪으며 현실로부터 눈을 돌렸다. 구인회 시절 그는 ‘토막’, ‘소’ 등의 작품으로 일제강점기 농촌의 암울했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검열이 가혹해지면서, 끝내 좌절한 그는 1941년 현대극장을 창립해 ‘북진대’, ‘대추나무’ 등의 친일 성향의 연극을 상연했다. 그의 작품 역시 일제의 검열 심화를 기점으로 현실의 문제에서 도피하는 낭만주의 성향으로 전향했다.

■ ‘동백’과 ‘김유정’, ‘사랑하는 것’에 대한 광기 어린 집착

동랑이 일하는 기업엔 연이어 테러가 발생한다. 외마디 말보다 폭력이 더욱 가까운 세계관이니 마냥 이질적인 상황은 아니다. 무장 단체는 기업의 연구실을 탈취하고 연구자들과 그들의 연구물을 노린다. 무장단체를 이끄는 인물은 ‘동백’, 과거 구인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료다.

그녀는 구인회에 대한 광기 서린 집착을 보여준다. 색색의 불꽃놀이를 좋아해 폭약을 연구하던 그녀는 몰락하는 구인회의 마지막을 한 떨기 불꽃으로 산화시켰다. 구인회 시절의 순수했던 열정을 좇아 현재의 모든 기술을 파괴해 그때의 순수함을 재현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인물이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동백의 모티프는 소설 ‘동백꽃’의 작가 ‘김유정’이다. ‘봄·봄‘ ‘만무방’ 등에서 보여준 분위기와 다르게, 김유정에게 극단적인 면모가 있었다는 사실은 퍽 기묘하다.

2남 6녀, 소위 ‘딸부잣집’의 일곱째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결혼한 누이들까지 떠나보낸 그는 극심한 애정결핍으로 여성에 대한 집착을 갖게 됐다. 우연히 당대의 명창 ‘박녹주’를 만나 그녀를 연모하게 된 그는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며 살해 협박을 담은 혈서를 보내는 등 가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고, 죽기 전까지도 그녀를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 관계에 목마른 날개 돋은 천재, ‘이상’

‘이상’을 이야기할 때면 종종 따라붙는 ‘괴짜’ 혹은 ‘천재’라는 말은 그의 작품이 그토록 파격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의 삶 역시 평범치 않다.

폐결핵을 앓던 그는 같은 질환을 겪던 김유정에게 동반 자살을 권할 정도로 통증 섞인 숨을 이어갔다. 당대 다방이 문인들의 ‘살롱(Salon)’ 역할을 했음을 고려하면, ‘제비’, ‘쓰루(鶴)’, ‘69’ 등 수 차례 다방을 여닫기를 반복했던 그의 행적은 그가 다른 이들과 관계 맺기를 바랐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야기 속 ‘이상’도 그렇다. 구인회 안에서도 그는 제법 빼어난 ‘천재’였다. 동료의 ‘유리창’ 기술을 개량해 보는 이에게 그의 가능성을 투영하는 ‘거울’을 만들었다. 그는 거울 앞에서 빛나는 날개를 가진 ‘상이’를 만났고, 이들과의 관계를 즐겼다.

이후 동랑에 의해 구인회가 해체되면서 관계를 잃어버린 그는 상실감에 가슴 언저리에 깊은 공허를 아로새겼다. 동료 ‘구보’에 손에 이끌려 간 하얀 박제실에 스스로를 가뒀지만, 거울 속 상이의 도움으로 끝내 그곳을 벗어난 후 멎지 못한 숨을 이었다.

■ 과거를 ‘거울’ 삼아 현재를 마주 보고, 미래의 ‘이상’을 향해 날아가라

세 인물의 이야기는 지나온 시간을 대하는 삶의 태도의 차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들의 과거는 모두 구인회다. 이를 받아들이고 대하는 방식이 각자의 운명을 갈랐다.

명백히 동백은 과거에 머무른다. 구인회 시절 품었던 이상은 집착으로 변질됐다. 한때 즐거웠던 시절의 향수에 젖어 그녀는 미래를 거부한다.

모든 기술을 완전히 소거한 뒤, 기반부터 하나씩 쌓아나가며 탐구하는 즐거움을 되살리길 원했던 그녀는 끝내 자신의 신념이 허황된 것임을 깨닫고 진한 향기를 머금은 생강나무꽃을 퍼뜨린 뒤, 정작 본인은 향 없는 붉은 동백꽃이 되어 아스라이 사라지며 죽음을 맞는다.

동백의 죽음은 유저에게 질문을 전한다. 유저는 남은 두 사람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과거는 어떤 의미인가?”

이에 동랑은 답한다. “간절히 벗어나고 싶은 그늘”이라고.

구인회 시절은 그에게 아픈 과거다. 밝게 빛나는 동료들 사이에 자신의 이상은 대기업의 압도적인 기술력으로 이미 실현됐다. 이대로는 어떻게 해도 밝게 빛날 수 없기에, 그는 과거를 지운다.

구인회를 해체하고, 대기업에 입사해 개발한 새로운 기술은 고작 구인회 동료의 아류작이다. 결국 그는 고향에서 키웠던 소 ‘누렁이’를 제 손으로 죽이며 과거를 잊기 위해 눈앞에 닥치는 미래를 쫓는다.

반면 이상에게 과거는 “실현되어 부정할 수 없는 가능성”이다. 시간은 덧없이 흐르고, 찰나의 가능성은 마치 필름 속 한 장면처럼 분절되어 과거로 기록된다.

하지만 기록된 과거는 몇 번이고 곱씹어 돌아볼 수 있다. 이상이 구인회 시절 만든 자신의 거울 앞에서 만난 상이는 언제든 자신이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의 모습이다. 상이의 날개가 실은 등 뒤에 있어 보이지 않았던 자신의 날개임을 깨달은 이상은 유리 조각처럼 찬란히 빛나는 날개를 펼치고 불확실한, 하지만 그래서 더욱 빛나는 미래를 향해 비상한다.

이 세 인물의 대비, 그리고 이야기의 주인공 이상의 서사를 통해 게임은 유저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마치 고전처럼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마주 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는 메시지를 게임 속에 녹여낸 것이다.

림버스 컴퍼니를 막연히 모바일 게임으로, 또는 서브컬처 게임으로 치부하기엔 다소 모자라다. 고전의 가치와 의의를 게임의 형식으로 전달한 림버스 컴퍼니는 게임이라는 매체의 예술적 가치에 대해 돌아보게 만든다.

림버스 컴퍼니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상 외에도 ‘모비 딕’의 이스마엘,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 등 여러 주인공들의 서사가 남아 있다. 이어질 스토리에서도 유저들에게 지금과 같은 진한 감동을 선사해 주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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