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지금도 '테이블-토크'에 목마를까

[게임플] 순수한 유쾌함을 느끼게 하는 영화였다. 동시에 즐거웠던 과거 기억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3월 말 개봉한 영화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는 국내에서 크게 흥행하진 못했지만, 좋은 평가와 관객 반응으로 어느 정도 입소문을 탔다. 사전지식을 몰라도 재미있을 만한 유머러스 연출, 원작 팬들에게 반가움을 주는 설정을 모두 구현해 과거 영화화에 대한 아쉬움도 덜었다.

보통 '던전 앤 드래곤'이라고 하면 오락실에 흔히 있던 4인 아케이드 게임을 떠올릴 수 있지만, 이 IP의 원류는 더욱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탄생한 RPG 규칙, 'D&D'로 불리는 룰북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D&D는 롤플레잉(RPG)이라는 개념과 장르를 탄생시켰다. 비디오 게임은 물론, 일반적으로 일컫는 모든 RPG를 뜻한다. 첫 RPG는 컴퓨터에서 실행되지 않았다. 룰북과 캐릭터 시트를 하나씩 들고 테이블에 모여 상상하고 이야기하는 TRPG(Tabletop RPG)였다. 

당연히 플레이어들이 필요했고, 스토리와 세계를 만들어낼 진행자도 필요했다. 현재 기준으로 PC와 모바일에서 연산하는 시스템을 사람이 대신한 것. 이런 진행자는 던전 마스터(DM)로 불렸다. DM이 없으면 TRPG는 시작 자체가 불가능했다.

옛날 직접 들고 다녔던 D&D 합본 룰북을 가까스로 발굴했다
옛날 직접 들고 다녔던 D&D 합본 룰북을 가까스로 발굴했다

롤플레잉은 지금 와서 레벨업을 비롯한 성장을 연상시키지만, TRPG에서 뜻은 본래 명칭에 맞는 '역할 연기'다. 

플레이어는 각자의 캐릭터를 들고 파티에서 함께 움직인다. 만들어진 능력치와 가치관, 성격에 따라 그에 맞는 대사와 연기를 한다. 그리고 허용되는 성향 내에서 기발한 묘수를 떠올려 상황을 타개하기도 한다.

어릴 적 TRPG 모임에 잠시 들어갔을 때, 주로 맡은 역할은 플레이어가 아닌 DM이었다. 규칙 숙지와 이야기를 짜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어떤 플레이어가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했을 때 유연하게 전개를 바꾸는 순발력이 특히 중요했다. 계산과 기억력도 갖춰야 하는 만능 포지션이었다. 그 시절 경험은 게임 이해도 향상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적당한 융통성도 필요했다. 규칙과 캐릭터 특성에서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행동을 구별해 허용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한때는 '뉴비' 플레이어들이 무게 계산을 너무 힘들어하자, 스토리 이벤트로 4차원의 주머니를 하나씩 얻게 해 무게 개념을 없애버리고 밸런스를 다시 짜기도 했다.

DM은 플레이어에 비해 피곤한 역할이다. 하지만 즐거움과 성취감은 컸다. 디지털 구조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TRPG의 가능성은 무한대였다. 그 세계를 짜맞추고 파티원들과 수정해나가는 재미는 비디오 게임에서 느낄 수 없었다. 간혹 일부 플레이어의 일탈 때문에 고생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경험이 쌓일수록 더 유연한 대처가 가능해졌다. 

아직 CRPG 시리즈의 명맥을 잇고 있는 '발더스 게이트 3'
아직 CRPG 시리즈의 명맥을 잇고 있는 '발더스 게이트 3'

D&D의 기본 규칙을 그대로 계승한 게임들도 밤을 지새며 플레이한 기억이 있다. 편의상 클래식 RPG(CRPG)로 불린 장르다. '발더스 게이트'나 '네버 윈터 나이츠' 등에서 자유로운 모험과 전투에 빠져들었고, 특히 '발더스 게이트2'는 지금도 동료마다 대사 하나하나가 기억에 남을 만큼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TRPG 존재감이 흐려진 시기도 있었다. 비디오 게임이 발전할수록 집에서 간편한 파티가 가능해졌고, 싱글 플레이 자유도 역시 올랐다. 매번 장소와 시간을 정해 만나야 하는 조건은 매력이 줄어든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은 즐거운 만큼 스트레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RPG는 죽지 않았다. 뉴미디어 흐름을 맞이하면서 재차 조명을 받는다. 게임 전문 방송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캐릭터를 생성하고 특유의 입담으로 상황극을 만들어가는 콘텐츠로 활용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침착맨, 주호민 등이 함께 한 TRPG 합방은 새로운 세대에게 재미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 속에는 D&D 외에도 수많은 세상이 있다. SF, 사이버펑크, 스팀펑크, 뱀파이어, 메카닉, 스페이스 오페라, 좀비 아포칼립스, 크툴루 신화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세계관은 TRPG 룰로 제작할 수 있다. 미디어 콘텐츠의 소재가 다양해지는 만큼 TRPG의 자유도는 더 오른다. 

최근 TRPG의 재조명을 바라보며 느끼는 것은, RPG의 본질이 결국 게임을 넘어 모두가 가진 이야기에서 나온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디지털이 발달해도 사람끼리 만들어내는 상상과 감성은 따로 있다. 영화 '던전 앤 드래곤'은 흥행작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게는 테이블에 둘러앉던 그 시절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트리거였다.

육성으로 대화하는 놀이가 귀해진 시대, 주말 TRPG 모임을 다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세상을 구하려고 뭉친 용사 파티도, 묘지를 파먹으려는 뱀파이어들의 이야기도 괜찮다. 상상력이 존재하는 한 TRPG는 여전히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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