턴제 RPG, 게임 스토리 애호가를 모두 열광시킬 뜻밖의 걸작
결론부터 말하겠다. 놀라운 게임이 나왔다. 이런 스토리 몰입은 서구권 RPG에서 오랜만에 만난다.
'클레르 옵스퀴르: 33원정대(이하 33원정대)'는 프랑스 신생 스튜디오 샌드폴 인터랙티브에서 만든 턴제 RPG다. 한국 시장 유통은 스마일게이트와 반다이남코가 각각 PC와 콘솔 플랫폼을 담당하고 있다.
첫 공개부터 이질적이었다. 벨 에포크 감성 충만한 판타지 세계에서 일본식 고전 RPG를 구현했다. 여기에 기존 게임에서 본 적 없는 신선한 시놉시스가 자리잡았다. 조합 하나하나가 낯설었다. 하지만, 탐스러웠다.
화가 페인트리스는 매년 잠에서 깨어나 숫자를 적는다. 그리고 해가 넘어가면 그 숫자와 같은 나이를 가진 사람은 연기로 변해 죽는다. 이 게임은 인류 마지막 도시 뤼미에르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담고 화가를 죽이기 위해 떠나는 33세 원정대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턴제 RPG는 구상하기 쉽지만 명작이 되기는 어려운 장르다. 신생 개발사에서 그것을 해낼 수 있을지, 이 독특한 이야기가 어떤 전개와 결말로 찾아올지 궁금했다. PC 플랫폼으로 플레이했고, 사양은 라이젠 9800X3D / RX 9070 XT다.
■ 직관적인, 동시에 입체적인 인간 본연의 이야기
낯선 세계관을 다루는 게임에서 흔히 저지르는 오류가 있다. 유저가 빠르게 이해하도록 여러 설명을 덧붙이는 것. 그리고 주제 의식을 던지기 위해 난해한 질문으로 나아가는 것. 그 경우 유저의 스토리 몰입은 오히려 초반부터 장벽이 생긴다. 요즘 떠도는 말을 빌리면, '지루하고 현학적'인 접근이다.
'33원정대'는 내러티브에서 이런 위험을 완전히 걷어낸다. 설명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볼 법한 짧은 대사로 축약해서 인물과 배경을 암시한다. 그러면서도 대사에 담기는 울림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신선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명쾌하게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구스타브, 마엘, 루네 등 핵심 대원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풀려나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관계성도 재미있다. 모두 각자 정체성과 가치관에 따라 현실적인 갈등이 엇갈리고, 그 안에서 소통하고 나아간다. 이어 세계관의 거대한 비밀에 조금씩 접근하는 포인트가 몇 있는데, 그때가 바로 이 게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순간이다.
처음부터 이후를 예측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중반부터 더욱 상상하지 못한 전개로 나아간다. 의문스러운 복선들이 한 곳에 퍼즐로 연결되고, 모든 것은 설명이 되면서 뜻밖의 전율을 안긴다.
내 전투 조작과 함께 빠져드는 이야기를 즐기고 싶은 유저라면,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게임이다. 단 한 가지만큼은 당부하고 싶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스포일러 없이 게임을 즐기기 바란다.
■ 캐릭터 하나마다 독립된 전투 구조
이렇게 내러티브에 무수한 강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33원정대'는 단순한 스토리 게임이 아니다. 더욱 독창적이고 정성이 느껴지는 분야는 바로 정교하게 깎아낸 턴제 전투다.
기본 틀은 '파이널 판타지' 초창기를 떠올리게 하는 고전 JRPG 형태다. 아군과 적이 나란히 맞서고, 속도에 따라 행동을 주고받으며 공격을 나눈다. 그런데 반응형 시스템이 조작 긴장감을 높이고, 캐릭터별 기술 매커니즘이 두뇌 회전의 재미를 높인다.
'33원정대' 속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사실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캐릭터 하나하나가 완전히 다른 시스템과 무수한 스킬 가능성을 가진다. 예를 들어 마엘은 스킬마다 공격과 방어 등 특정 태세로 전환이 가능하고, 각 태세마다 패시브 효과를 가지며 특정 태세를 조건으로 다른 스킬을 발동하는 등의 연계를 사용한다.
원소술사인 루네는 '얼룩'이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코스트가 하나 더 있다. 그래서 스킬에 따라 각기 다른 얼룩을 사용해 위력을 높이고 또다른 얼룩을 스택에 저장한다. 이를 통해 마치 트레이딩 카드 게임(TCG)처럼 내 취향과 적 약점에 맞춘 덱빌딩도 가능하다.
■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조합이 가능하다
각 캐릭터는 성장하면서 다양한 스킬을 배우고, 픽토스라는 이름의 '퍽'을 획득해 패시브 효과를 장착할 수 있다. 장착한 픽토스를 숙련시키면 루미나를 통해 코스트에 맞는 효과를 지속적으로 얻는다. 여기서 발생할 수 있는 세팅 가짓수만 해도 플레이 한번만으로 모두 발견하기 어렵다.
기술 장착도 한정되어 있어 특정 테마 시너지를 맞추는 과정이 즐겁다. 화염 기술만 집중 장착해 연소 시너지 조합을 짤 수도 있고, 징표 연계 스킬을 서로 넣으면서 한 번 딜링 타임에 극한의 대미지를 우겨넣는 공략도 가능성이 있다.
컨트롤을 통해 극복하는 재미도 충분하다. 적의 공격 패턴에 따라 회피나 패링을 타이밍 맞게 눌러 대응할 수 있고, 이 둘은 완벽한 타이밍일 경우 추가 보너스도 얻는다. 단체 점프 후 카운터라는 수단도 존재한다.
더 매력적인 점은, 타이밍과 스킬 전략이 모두 강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보통 난도인 원정대 모드 기준으로, 몸과 머리 중 하나만 고생하면 충분히 전투 승리가 가능하다. 둘 모두 편하고 싶을 경우 스토리 모드로 간편하게 탐험을 즐겨도 된다. 둘 모두 극한으로 도전하려는 유저를 위한 전문가 모드도 준비됐다.
■ 총평 - 섹시한 턴제 시스템이 파괴적인 시나리오를 만났을 때
메인 스토리는 약 25시간이 소모됐다. 숨겨진 길을 굳이 찾지 않고 눈에 보이는 곳만 탐험하며 나아갔기 때문에, 개발사가 밝힌 30시간 플레이타임은 얼추 들어맞는다. 그만큼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빨리 보고 싶었다. 상상하지 못한 세계와 탐험의 변화로 각종 선택지와 엔드 게임 플레이도 충분히 마련됐다.
단점을 꼽는다면 화면 속 아름다운 배경에서 상호작용할 것이 많지 않다는 점, 나침반 하나에 방향을 의존해야 해서 가끔씩 불편해지는 초중반 길 찾기다. 또 패링의 손맛이 워낙 뛰어나지만, 너무 완벽하게 대응하면 전략 자체가 필요 없어지는 느낌도 종종 받는다.
하지만, '클레르 옵스퀴르: 33원정대'는 플레이 전 상상한 것의 몇 배 이상을 보여주는 게임이다. 사소한 단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탁월한 스토리와 연출로 장대한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그 스토리를 매듭짓고 나서도 끝없이 재미를 발휘하는 반응형 턴제 전투가 기다리고 있다.
신규 IP 게임 중 2025년 최고의 발견이며, 턴제 RPG 마니아와 게임 스토리 애호가를 모두 열광시킬 수 있는 걸작이라고 칭하고 싶다. 개발사 샌드폴 인터랙티브가 앞으로 선보일 결과물도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들이 진화할 방향은 전투일까, 혹은 스토리일까. 기왕이면 둘 모두였으면 한다.
■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
리뷰 플랫폼 : PC
평점 : 9.0 / 10
GREAT
알기 쉽고, 격렬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최고의 스토리
동료마다 깊은 매커니즘을 가진 스킬 시스템
빠른 판단력으로 반응하는 턴제 전투의 진화
시네마틱, 보스, 세계를 완벽하게 전달하는 연출력
WEAK
조금 혼란스러운 탐험 편의성
종종 과하게 많은 것을 좌우하는 패링과 회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