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들면 검증된 재미, 지속 가능성 충분, 아직 비어 있는 시장 기회
게임 유행은 돈다. 서브컬처 유행은 더욱 빠르게 바뀐다. 새로운 트렌드로 '덱빌딩 로그라이크'가 오고 있다.
서브컬처 게임 시장은 최근 10년간 게임계에서 가장 뜨거워진 분야로 꼽힌다.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 개발사들이 주도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이들과 대등하게 맞서는 한국 게임들도 늘어나며 대형 업계로 성장했다. 다만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는 중국 게임 홍수, 비슷한 장르의 범람도 이어지면서 레드 오션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도전의 장답게 아류작 개발은 물론 새로운 장르 개척도 활발하다. 서브컬처에 어떤 요소를 섞어 트렌드를 이끌지 연구가 이어졌다. 이런 배경에서 덱빌딩 로그라이크 서브컬처는 지난해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한때는 전투에 출전할 파티원을 조합하는 것만으로 덱 빌딩이라고 홍보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방식이 당연시되는 동시에 진짜 덱빌딩 장르 게임들이 나타나면서 확실한 구분선이 생겼다. 많은 게이머들이 알다시피, 이 장르가 처음 각광받은 지점은 서브컬처가 아닌 스팀 인디 게임이었다.
2017년 얼리액세스를 시작한 '슬레이 더 스파이어(슬더스)'는 단 2인 개발사로 출발했지만, 전 세계 게임 지형을 바꾼 주인공 중 하나로 꼽힌다.
턴제 전투에 카드 덱을 만들어가고 로그라이크 탐험 방식을 섞어 수많은 유저가 밤잠을 잊게 만들었다. 당연히 아류작이 쏟아져나왔고, 대형 게임사에서도 영감을 받아 기존 게임 콘텐츠로 비슷한 방식을 대거 차용하면서 '슬더스류'라는 장르를 탄생시켰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또다른 분야가 서브컬처다. 수집형 게임들은 고질병이 있었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전투, 캐릭터 성능에 묻혀버리는 전략성 등으로 인해 콘텐츠 '재미'를 지속하기 쉽지 않았다. 반면 덱빌딩 로그라이크 콘텐츠는 뼈대만 잘 닦으면 무작위로 매번 수많은 경우의 수를 즐길 잠재력을 지녔다.
한국에서 신호탄을 쏘아올린 덱빌딩 서브컬처로는 '크로노 아크'가 꼽힌다. 뽑기 게임이 아닌 유료 게임이지만, 중화권까지 인기가 퍼지면서 인디 게임으로 30만 장 판매를 넘기는 성과를 거뒀다. 스팀 평가 역시 매우 긍정적(90%)을 기록하면서 꾸준하게 팬덤의 사랑을 받는 게임이다.
지금까지 최대 성공 사례는 반다이남코의 '학원 아이돌마스터(학원마스)'다. 육성 장르와 '슬더스'류의 결합이라는 시도로 일본 시장을 휩쓸었다. 1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일본 서브컬처 게임 중 최고 실적을 올리고 있다.
육성 시나리오로 아이돌을 키워 라이브 대결을 펼치는 흐름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와 비슷하지만, 라이브 과정에서 덱빌딩 요소 투입은 신의 한 수로 작용했다. 육성마다 부담은 덜면서 재미는 키웠고, 레벨별 카드 해금 시스템으로 꾸준하게만 플레이해도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서브컬처 개발에서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이 방식이 검증된 재미를 갖췄는데도, 아직 한국과 글로벌 시장을 확실하게 점유할 게임이 들어오지 않았다. '학원마스'는 지금까지 일본 외 지역 진출 계획을 묻는 질문에 보수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벤치마킹으로 시장을 이끌기에 절호의 기회다.
스마일게이트의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카제나)'는 선점을 노릴 수 있는 후보작 중 하나다. 턴제 덱빌딩 로그라이크 RPG로 2025년 출시 예정이다. 슬더스류 카드 배틀에 '에픽세븐'을 개발한 슈퍼크리에이티브 특유의 화려한 애니메이션이 겹쳐졌다.
중국 쪽에서도 중소 규모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덱빌딩 로그라이크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상당수가 카드 덱을 중심으로 한 슬더스류다. 그밖에 여러 국내 개발사에서도 덱빌딩 관련 게임 프로토타입 기획에 한창이라는 소식이 업계에서 나온다.
개발 코스트가 확연히 적다는 점이 매력이다. 서브컬처 오픈월드 게임들이 제대로 콘텐츠를 채워넣기 위해 쉴 틈 없이 막대한 개발력을 업데이트에 투입해야 하는 것과 달리, 카드 관련 로그라이크는 정예 인력이 가지는 역량이 결정적이다. 무한 자본과 인력으로 무장한 중국 게임계와도 경쟁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단, 덱빌딩 서브컬처의 과금 모델(BM)은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상품화할 만한 요소는 굉장히 많기 때문에, 무엇을 판매하고 무엇을 인게임 제공할지 선택에 따라 과금 부담이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 학원마스 역시 BM 관련 평가는 좋지 않다.
재미는 당연히 뛰어나야 하고, 기업과 유저 모두 만족할 BM 밸런스를 구축하는 게임은 크게 앞서나갈 수 있다. 물론 서브컬처 팬들을 홀릴 캐릭터와 스토리도 필수다. 덱빌딩 로그라이크에서 이 과제를 먼저 완수할 수 있다면, 분명 큰 리턴이 기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