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4월 '그래픽 머드(MUD)' 게임으로 출시... 머드 게임 특징 그대로
김정주 "온라인 게임, 사이버 공간에서의 문화를 창조하는 매개체 될 것”

[게임플] 넥슨의 클래식 RPG ‘바람의 나라’가 서비스 1만 일을 2주 앞뒀다. 지금으로부터 26년 전, 바람의 나라를 만든 故 김정주 넥슨 창업주의 논문에는 바람의 나라를 통해 바라본 대한민국 온라인 게임의 가능성이 담겨 있다.

1996년 4월 5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게임사 넥슨의 시작을 알린 첫 작품 ‘바람의 나라’가 출시됐다. 지금으로부터 햇수로 무려 27년째, 8일 기준 9,986일간 서비스를 이어온 것이다. 이는 해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전례 없는 기록으로, 2011년 9월 19일 바람의 나라는 가장 오래 서비스 중인 그래픽 MMORPG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등재됐다.

서비스 1만 일을 앞둔 어느 날, 우연히 한 논문이 눈에 들어왔다. 넥슨의 창업주이자 바람의 나라의 개발자 故 김정주의 논문이었다.

1997년 8월, 그러니까 게임이 막 출시된 지 1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 그는 한국정보과학회가 발간하는 정보과학회지에 바람의 나라 개발에 들어간 기술을 해설하는 짧은 논문을 한 편 올렸다. 논문에는 지금과는 달리 인터넷이라는 개념이 한창 태동하던 당시의 개발 환경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 바람의 나라 출시와 함께 시작된 대한민국 온라인 게임의 미래에 대한 그의 희망어린 소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네트워크 속에서 여러 유저들이 상호작용하는 온라인 게임이 가진 가능성에 주목했다. 당시 유행하던 패키지 게임과 다르게 온라인 게임 속에선 마주하는 상대가 나와 같은 사람이다. 이로 인해 서로 다른 입장이 충돌하기도, 또 이를 해결해 나가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트워크로 이뤄진 가상의 세계에서 우리는 마치 인류가 그랬듯이 한데 모여 사회를 만들고 문화를 만들어 간다. 그것이 김정주가 찾은 온라인 게임만의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당시 온라인 게임은 지금의 라이브 서비스 게임과 다소 차이가 있다. 앞서 다룬 대로, 인터넷 환경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IPX를 활용해 특정인의 서버를 기반으로 소수의 인원이 참여할 수 있는 게임이 많았다.

하지만 김정주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회사를 설립하거나 벤처 캐피털의 투자를 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당시, 김정주와 당시 개발자들은 한국IBM의 투자를 받아 한 서버에 수천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TCP/IP를 활용한 오늘날 온라인 게임의 전신을 구현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바람의 나라를 김정주는 “캐릭터의 모든 상황과 메뉴 등이 그래픽으로 구현된 최초의 ‘그래픽 머드(MUD)’”라고 칭한다. 1978년 출시된 동명의 게임 ‘멀티 유저 던전(Multi-User Dungeon)’에서 시작된 머드 게임은 텍스트 기반의 온라인 게임이다. 말 그대로 온라인 세계 안에서 유저와 유저가 서로 텍스트를 통해 행동하며 교류하는 게임이다. 이 머드 게임이라는 기반 위에 그래픽을 더해 만들어진 게임이 바로 바람의 나라였다.

그래서 당시 바람의 나라엔 머드 게임의 특징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전투의 상황이나 동작을 채팅으로 선택하는 것뿐만 아니라, 주막의 이모에게 외치던 “동동주 줘”로 대표되는 텍스트 기반 상호작용 역시 머드 게임의 유산이다.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봐도 상당히 혁신적인 기법이다.

바람의 나라는 국내 최초의 온라인 게임이면서 동시에 국내 최초의 정액제(定額制) 게임이었다. 부분유료화가 당연시되는 지금과는 다르게 인터넷이 자리 잡던 당시에는 바람의 나라 이후 등장한 대부분의 온라인 게임이 정액제 BM을 채택했다. 당시 바람의 나라는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와 협업해 이용료의 일정 부분을 나눠 받거나, 유저에게 정액제 구매를 요구했다.

하나 다행이었던 점은 정액제 구매를 하지 않아도 체험판 제도를 통해 게임의 일부분을 맛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기자 역시 바람의 나라를 비롯한 넥슨의 클래식 RPG를 즐길 수 있었다. 기억상 당시 바람의 나라는 20레벨까지 체험이 가능해 20레벨을 코 앞에 두고 게임 속 세계 곳곳을 유랑하며 게임을 즐겼다. 이따금 ‘죽은 자의 온기가 남아있는’ 아이템 위에 서서 주인이 올 때까지 아이템을 지켜주는 방범대 노릇을 자청했던 기억도 있다.

다시 논문으로 돌아와서, 저자는 바람의 나라의 미래를 통해 한국 온라인 게임의 전망과 방향을 논했다. 당시 그는 게임 그래픽에 대한 국내 인력과 이를 육성하는 기관의 부재, 캐릭터 산업의 소규모성, 당시 인터넷 서비스의 한계를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온라인 게임이 가진 가능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들만 제대로 해결된다면 국내에서 개발한 게임이 해외로 진출할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고 믿었다. 실제로 다른 어떤 국가와도 견줄 수 없는 대한민국만의 인터넷 발전사와 더불어 바람의 나라 이후 넥슨이 서비스한 무수한 온라인 게임들을 돌아보면 그가 본 미래가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 넥슨을 비롯한 국내 게임사의 작품 중엔 해외 유명 게임사들의 작품과 견주어봐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높은 구현도를 자랑하는 게임도 있으며, 다양한 마스코트를 필두로 내세운 게임이 장기간 유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 않던가. 또한 그의 바람대로 여러 국내 게임이 해외에서도 훌륭한 성적을 내고 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논문의 말미에 그는 “온라인 게임은 이제 오락의 범주에서 벗어나 사이버 공간에서의 문화를 창조하는 매개체로 적용되게 될 것”이라 밝혔다. 지금으로부터 26년 전, 게임 개발 일선에 나섰던 그가 바라본 미래의 모습은 우리의 지금과 썩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가 만든 바람의 나라는 일만 일이라는 시간과 함께 지금도 불어오고 있다. 故 김정주의 철학을 품은 타임캡슐로서 앞으로도 긴 시간 우리 곁에 머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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