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를 미치게 하고 싶다", "조울증 게임"... 희노애락 응축된 매력
22일 VCT 퍼시픽 스테이지1 개막, 모든 승부는 끝까지 모른다

"발로란트 처음 봤는데 정신 나갈 것 같아요. 원래 이래요?" / "네."

일요일 늦은 밤, 모든 e스포츠 팬들을 '미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T1이 2일 발로란트 마스터스 방콕 결승에서 G2를 3:2로 꺾고 창단 최초 대회 우승과 국제전 우승을 차지했다. 패승패승승, 게다가 4세트와 5세트는 연장 접전을 펼치는 세기의 명승부였다.

대회 과정도 인위적으로 느껴질 만큼 극적이었다. 한 번도 넘지 못했던 DRX를 스위스 스테이지 단두대 매치에서 만나 신승했고, 플레이오프도 첫 경기를 패하며 시작부터 패자조에 몰렸다. 그런데 유럽 1시드 바이탈리티, 중국 1시드 EDG, 아메리카스 1시드 G2까지 각 리그 맹주를 3일 연전에서 모두 이겨내는 기적을 연출한 것이다.

결승 뷰어십도 폭발했다. 8팀 중 최약체로 취급받은 T1이 언더독 드라마를 쓰고, 팀 이름값까지 긍정적 관심에 한몫한 것. 한국 최대 동시시청자는 유튜브, 치지직, 숲 통합 17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면서 역대 최고가 확정적이다. 세계적으로도 발로란트 역대 TOP5에 들어가는 시청자를 기록했다.

T1이 걸어온 대진표만 봐도 한 편의 드라마였다
T1이 걸어온 대진표만 봐도 한 편의 드라마였다

■ 전 타석 병살타로 욕 먹은 선수가 빗맞은 싹쓸이 3루타를 날릴 때

최근 발로란트 대회 재미를 두고 '사이버 야구'라는 표현이 국내에서 퍼지고 있다. 처음 표현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격렬한 공감을 얻었고, 이번 결승의 롤러코스터 흐름을 많은 신규 시청자가 만끽하면서 완벽한 단어로 자리잡았다.

야구는 수많은 스포츠 중에서도 팬 조울증 유발에 최적인 종목으로 불린다. 

공방 턴마다 극단적으로 다른 결과가 나와 끝까지 모르는 경우가 잦다. 또 잘 친 타구가 게임을 패배로 이끌기도, 어설프게 맞은 공이 승리를 결정지은 영웅으로 만들기도 한다. 발로란트 역시 비슷한 결에서 모두를 미치게 하는 맛이 있다.

발로란트는 각 맵(세트)마다 13개 라운드를 승리하면 그 맵의 최종 승리자가 된다. 매 라운드마다 공수 양팀의 전략 가위바위보가 맞물린다. 스킬이 엉망으로 소모돼도 한 방의 샷이 게임을 극복할 때가 있고, 반대로 기가 막힌 스킬 활용으로 상대 심리를 읽어 뒤집히기도 한다. 스킬과 에임의 중요성이 절묘한 밸런스를 유지한다. 

젠지와 T1을 오가며 마스터스 준우승-우승-우승 신화를 달성한 '메테오' 김태오
젠지와 T1을 오가며 마스터스 준우승-우승-우승 신화를 달성한 '메테오' 김태오

서로 12:12 매치 포인트에서 동점이 되면 연장에 진입한다. 듀스 룰이 적용되어 2점 차가 나야 게임이 끝난다. 팬들의 조울증이 극한에 달하는 순간이다. 금방 끝날 듯한 기세가 바로 사그라들고, 팽팽하던 균형이 허무하게 무너지기도 한다.

"이걸 이긴다고?" 라며 터져나오는 열광이 채 식기도 전에 "이걸 진다고?" 라는 경악과 한숨이 뒤덮는 경우가 많다. T1 역시 결승 3세트 18라운드에서 기가 막힌 택틱으로 4대1 상황을 만들며 "이게 팀이지"라는 해설 찬사를 들은 뒤, 단 10초 뒤 어이 없는 팀워크로 1대4 클러치를 헌납하고 "이게 팀이냐"는 한탄을 들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하는 게임이라 반전 드라마가 잦다. 기대도 하지 않던 선수가 중요할 때 '접신'하기도, 매번 최고의 샷을 자랑하던 선수가 결국 압박감에 손이 흔들리기도 한다. 자금과 멘탈에서 말리기 시작하면 7~8점 차이도 순식간에 따라잡히는 일은 적지 않다. 9:3이 자주 역전되는 '그 스코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다. 

3세트 G2 조그모의 클러치 에이스가 터지는 순간 채팅 반응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3세트 G2 조그모의 클러치 에이스가 터지는 순간 채팅 반응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 저점 매수 기간은 끝났지만, '인생 희노애락'은 계속됩니다

지난해 젠지가 마스터스 마드리드에서 아깝게 준우승에 그쳤을 때 "한국 발로란트, 지금 '저점 매수'할 때"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기대는 현실이 됐다. 결국 젠지는 마스터스 상하이를 재패했고, 올해 T1이 또다시 해냈다. 비록 챔피언스가 아쉬웠지만 마스터스는 준우승에 이은 한국 팀 2연속 우승이다. 

T1 우승이 인상적인 점은 또 있었다. 우승 이후 반응이다. 발로란트 경기를 처음 체험해봤다는 글이 검색에 무수하게 잡혔고, 리그 일정과 재미를 물어보는 질문도 많다. T1의 영향력과 함께 서사와 드라마의 힘을 새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지역 리그에 해당하는 VCT 퍼시픽 리그도 '사이버 야구'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다. 각팀 색깔이 뚜렷하면서 각자 매력을 가지고 드라마를 연출한다. 숨 막히는 라운드와 매치 승부는 흔하다. LoL에 비해 훨씬 적극적인 선수들의 중간 세리머니도 볼 거리다.

당신을 미치게 할 준비를 마친 퍼시픽 리그 12개 팀
당신을 미치게 할 준비를 마친 퍼시픽 리그 12개 팀

최근 VCT 퍼시픽 리그는 한국 팀의 독무대다. 전통의 싱가포르 강팀 PRX가 흔들리는 사이 DRX와 T1이 킥오프 결승을 한국 내전으로 만들었다. 젠지 역시 선수 유출이 심했지만 3위로 저력을 입증했고, 승격팀 농심은 '담비' 이혁규 던지기로 대표되는 엽기적 공격성으로 즐거운 파란을 일으켰다. 

물론, 이래도 발로란트는 다음 대회에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갑자기 매 경기 접전, 뜻밖의 부진은 흔하다. 의외의 팀이 각성해 리그를 쓸어담기도 한다. 가장 큰 뷰어십을 가진 일본 팀들이 다시 급부상할 수도 있다. 그런 예측 불가능한 속도감이, 바로 매번 팬들을 '도파민 파티'에 빠지게 하는 원동력이다. 

2025 VCT 퍼시픽 스테이지1은 3월 22일 개막한다. 총 12개 팀이 2개 조로 나뉘어 혈전을 치르고, 3개 팀이 선발되어 다음 국제전인 마스터스 토론토로 향한다. 지켜봐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리그에서 느끼게 될 감정은 기쁨일까 좌절일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둘 모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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