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지방 경주마가 기적을 써내려간 이야기
[게임플]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는 일본의 실존 경주마들을 미소녀화한 게임입니다. 어떻게 이런 신기한 발상을 했느냐는 경악,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와 매출로 충격을 선사했죠. 카카오게임즈의 국내 서비스 발표로 기대감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비결은 캐릭터, 그리고 그 캐릭터들에 얽힌 서사에서 나옵니다. 하나의 스포츠 드라마를 보는 듯한 몰입감은 애니메이션에 이어 만화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매주 주요 캐릭터의 원본마 스토리를 살펴보고, 이것이 어떻게 IP로 재해석됐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존 팬들에게는 이야기를 되새기는 즐거움을, 입문자들에게는 캐릭터 이해와 새로운 스토리에 대한 재미를 드리려 합니다.
가난한 시골 망아지, '괴물'이 되다
1985년, 훗카이도의 가난한 목장에서 회색 망아지 하나가 태어났습니다. 경주마의 자식이었지만, 앞발이 바깥으로 심하게 굽혀져 있어 경주는 커녕 혼자 일어나기도 힘든 그저 그런 말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미말이 젖을 물리기 싫어해 삐쩍 마른 채로 자랐고, 그 여파로 나중에 먹을 것에 엄청나게 집착해 잡초까지 뜯어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나마 먹성 덕택에 성인 말이 된 뒤 어느 정도 체격을 회복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이 말의 이름은 '오구리 캡'입니다. 아버지 댄싱 캡, 마주 오구리 코이치의 이름을 각각 따서 붙인 이름이죠.
카사마츠라는 지방에서 데뷔한 오구리 캡은, 신체적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괴물 같은 성적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단 두 번만 2착을 했을 뿐, 그밖에 모든 경기에서 1착으로 들어오면서 8연승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주목 받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중앙에서 봤을 때 지방 경기는 수준이 아주 낮았거든요. 최고 권위 등급인 'G1' 대회가 축구의 1부리그라면, 지방 최고 대회라봐야 4~5부 정도 취급도 간신히 받을 정도의 차이입니다. 그저 "저 먼 동네에 좀 뛰는 말이 있다더라" 수준으로만 회자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구리 캡이 중앙으로 이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의 반응은 완전히 뒤바뀝니다. 이 말은 '회색의 괴물'이 맞았습니다.
'회색마 정상결전'
이름 난 강자들을 모조리 쓰러뜨리며 G3과 G2 대회를 싹쓸이한 결과, 중앙 레이스에서도 6전 전승을 달리며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G1 경기, 1988년 덴노상 가을에서 당대 최강의 말 타마모 크로스와 승부를 겨루게 됩니다.
여기까지 한 번에 이겨버리면 스토리가 너무 시시해지겠죠? 첫 대결에서 오구리 캡은 치열한 명승부 끝에 타마모 크로스에 이어 2착으로 들어옵니다. 중앙 첫 패배였죠. 이어진 재팬컵에서도 페이 더 버틀러와 타마모 크로스에 뒤쳐져 3착에 그칩니다.
물론 G1에서 2착과 3착도 엄청난 성적이지만, 이기지 못했다는 건 언제나 아쉬운 법이죠. 이쯤 되면 "정말 강하지만 최강이라기엔 부족한 것 아닌가?" 라는 의문이 슬슬 올라올 법도 합니다.
바로 그 순간이 이야기가 다시 전개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세 번째 대결인 1988년 연말 그랑프리 아리마 기념에서, 오구리 캡은 마침내 타마모 크로스를 꺾게 됩니다. 이번에도 아슬아슬한 차이로요. 타마모 크로스 은퇴전이었기 때문에 대관식을 치를 마지막 기회였는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토리를 완성한 겁니다.
인형 '천만 개'를 판매한 전국민의 아이돌
왕좌에 오른 다음은 자연스럽게 지키기 위한 싸움이 이어집니다.
1989년 가을부터는 새로운 라이벌 슈퍼 크릭, 이나리 원과 함께 최고 레벨 대회에서 우승을 다투게 됩니다. 대부분의 승부는 목 차이, 심지어는 코 차이. '역대급 명승부'가 쉬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당연히 경기장은 인산인해가 됩니다.
실제 스포츠로 치환해보면 얼마나 그림 같은 스토리인지 그려집니다.
지방 하부 대회에서 데뷔한 듣도 보도 못한 가난뱅이 팀이
전승 우승으로 1부 리그에 진입하고
기존 강자들을 충격적인 퍼포먼스로 눕혀버린 끝에,
1위 자리를 놓고 최강자들과 숨막히는 혈전을 치르는 감동 실화.
'병약한 흙수저'로 출발해 신화를 이룬 오구리 캡의 이야기에 대중들은 열광하게 됩니다. 경주마를 본 적조차 없는 사람들조차 오구리 캡이라는 이름은 알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게다가 나중에 적을 기회가 있겠지만 타마모 크로스나 슈퍼 크릭, 이나리 원 같은 말들도 다들 만만치 않은 사연을 가졌고요. 그런 서사가 한 곳에 모이자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공기가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처럼, 일본 역시 그 시절까지는 마장이 도박꾼 아저씨들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 곳에 여성 팬들이 몰려들어 "오구리"를 연호하고, '오구리 걸즈'라는 명칭까지 붙었습니다.
나중에는 가족 단위의 관람객까지 '아이돌 호스'의 레이스를 보기 위해 모여들게 됩니다. 경주마에 열광하고 굿즈를 사는, 이전까지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집니다.
경주마 캐릭터 인형도 오구리 캡으로 인해 처음 나왔습니다. 당시 오구리 캡 인형의 판매량은 놀랍게도 1천만 개를 넘겼습니다. 이를 고증한 듯 우마무스메 게임에서도 오구리 캡과 인형뽑기 관련 이벤트 스토리가 자주 나오곤 하고요.
오구리 캡은 경주마로서 전설을 넘어, 한 국가의 문화적 인식을 뒤바꾼 겁니다.
혹사, 그리고 쇠락
최강마의 영광은 길지 않았습니다. 전국민적 인기를 얻었지만, 지나친 인기는 독으로 돌아왔습니다.
마방에 몰려오는 사람들과 24시간 취재 경쟁은 말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로 다가왔고, 비즈니스 이슈로 인해 혹사에 가깝게 레이스에 자주 출전하면서 몸도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인간이 문제라니까요.
1990년 들어 오구리 캡은 급격한 부진에 빠집니다. 만 5세가 경주마로서 노장 대열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쇠락'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덴노상 가을에서 6착, 이어진 재팬컵에서 11착. 부상으로 만신창이가 되면서 우승은 커녕 뒤에서 세는 것이 더 빠를 정도의 상태가 되고 맙니다.
오구리 캡은 더 이상 뛰지 못한다는 결론이 났고, 결국 그해 아리마 기념에서 은퇴전을 가지기로 합니다. 그마저도 제대로 뛸 수 있을지 걱정하는 여론이 형성됐고요.
결국 아리마 기념, 모두의 아이돌이었던 오구리 캡의 라스트 런을 보기 위해 엄청난 인파가 모였습니다.
하지만 그중 우승을 확신한 사람은 많지 않았죠. 이제 쓸쓸한 퇴장만을 앞뒀지만, 그저 한 전설의 마지막 달리기를 눈 앞에서 보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관중들은 설령 오구리 캡이 꼴찌로 들어오더라도 박수를 쳐줄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겁니다.
그 자리에서, 소년만화 최종편이 시작됩니다.
"오구리 1착! 오구리 1착!"
그 이상 무슨 멘트가 필요하겠냐는 듯 연달아 울리는 아나운서의 외침, 동시에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말은 오구리 캡이었습니다.
4코너를 돌아 직선에 접어들자마자 전성기 그대로의 스퍼트를 보여주며 선두로 치고나왔고, 당대 최고의 말 중 누구도 그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회색의 괴물' 오구리 캡이 마지막 순간 다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위닝 런을 하는 사이, 경기장에 모인 17만 명의 관중들은 '오구리 콜'을 연호했습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지만, 그 순간이 모든 사람들에게 환희로 가득 찼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처음부터 마치 거짓말 같았던 오구리 캡의 이야기는 끝까지 기적으로 끝났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했죠. 이런 나의 등에도 날개가 있다고"
- 오구리 캡 캐릭터 테마 'Unbreakable' 가사 중에서
애니메이션은 90년대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만큼 주연으로 등장하진 않는데요. 잠깐씩 오가는 조연으로도 존재감은 확실합니다.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어치워서 주변에 접시가 쌓여 있곤 하죠. 타마모 크로스, 슈퍼 크릭과 빨리 먹기 대회를 벌여서 우승하는 씬도 있습니다.
대신 오구리 캡이 빛나는 작품은 만화 '우마무스메 신데렐라 그레이'입니다. 소년만화 주인공이 정말 만화 주인공으로 선택된 것이죠. 흙투성이 우마무스메 하나가 중앙에 올라와 기적처럼 '신데렐라'가 되는 실화 기반 이야기입니다.
아직 한국에 발매되지 않았지만, '치트키'에 가까운 스토리와 순수 스포츠물로서 긴박감을 극대화한 연출로 걸작 조짐을 보인다는 평가입니다. '일본 차세대 만화 대상 2021'에서 코믹스 부문 2위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라스트 런 파트에서 울 준비는 이미 되어 있다"는 팬들의 반응도 보입니다. 연재분은 타마모 크로스와의 대결이 한창 진행 중인데, 빨리 우리말 번역으로 즐기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돌 우마무스메"
우마무스메 게임에서 오구리 캡은 '출시 보상 선택권 사용 1순위 캐릭터'입니다. 마일-중거리-장거리에서 모두 뛰고, 잔디뿐 아니라 더트 마장까지 두루두루 사용할 수 있거든요.
차후 열리는 PvP 콘텐츠 챔피언스 미팅에서도 범용성 최상위권을 달립니다. 얼마나 험난한 경주마의 삶을 거쳐왔는지 새삼 느껴지게 하는 부분입니다. 역대 최고 먹성을 반영해 선행 회복 스킬인 '먹보'가 붙은 것도 큰 장점입니다.
게임에서 오구리 캡 육성의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아이돌 우마무스메'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는데요. 모든 캐릭터가 위닝 라이브가 가능한 이 게임에서도 혼자 '아이돌'이라는 칭호를 가졌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보여줍니다.
오구리 캡은 스포츠 스타였고, 하나의 문화현상이었습니다. 레이스를 보기 위해 17만 명이 현장에 몰렸다는 것부터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을 겁니다. 최악의 환경과 신체조건에도 불구하고 기적을 만들어냈고, 그 이야기는 곧 대중들에게 희망이자 의지로 자리잡았죠.
우마무스메 프리티더비 한국어 이미지에는 '꿈을 걸고 달리는 소녀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경주마의 진짜 꿈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오구리 캡의 달리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꿈이 있었고, 그것은 실현됐습니다. 어쩌면 이 문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진정한 드림 호스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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