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에 달린 파란 장미 한 송이가 심금을 울리는 이유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는 일본의 실존 경주마들을 미소녀화한 게임입니다. 어떻게 이런 신기한 발상을 했느냐는 경악,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와 매출로 충격을 선사했죠. 카카오게임즈의 국내 서비스 발표로 기대감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비결은 캐릭터, 그리고 그 캐릭터들에 얽힌 서사에서 나옵니다. 하나의 스포츠 드라마를 보는 듯한 몰입감은 애니메이션에 이어 만화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매주 주요 캐릭터의 원본마 스토리를 살펴보고, 이것이 어떻게 IP로 재해석됐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존 팬들에게는 이야기를 되새기는 즐거움을, 입문자들에게는 캐릭터 이해와 새로운 스토리에 대한 재미를 드리려 합니다.



축복의 이름

'라이스 샤워'라는 서양 풍습이 있습니다. 결혼식을 마친 신랑과 신부에게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쌀알을 뿌리는 의식.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장식하는 환호와 축복이라고 할 수 있죠.

그 축복의 이름을 얻은 경주마도 있습니다. 1989년 태어난 작고 검은 말. 처음부터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스테이어(장거리 주자) 적성은 있었지만, 동기 중에서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한 말이 따로 있었거든요.

만 3세 시즌, 경주마들은 그 해에만 참가할 수 있는 클래식 시즌에 나섭니다. 그리고 1992년 클래식에서 최고의 스타는 '미호노 부르봉'이었습니다.

괴물 같은 스피드와 혹독한 훈련을 거친 마체로 클래식 G1 경기인 사츠키상, 일본 더비를 휩쓸며 '사이보그'라는 별명을 얻은 경주마입니다. 라이스 샤워는 뒤따라 들어오는 조연이 될 수밖에 없었죠.

남은 클래식 G1은 3,000미터 장거리 코스인 킷카상. 여기만 이기면 미호노 부르봉은 과거 심볼리 루돌프에 이어 '무패 클래식 삼관'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게 됩니다. 당연히 역사의 순간을 함께 하기 위한 관중들이 교토 경마장에 몰렸습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골인한 말은 부르봉이 아니었습니다. 라이스 샤워였습니다.

(출처: 위키피디아)
(출처: 위키피디아)

'관동의 자객, 레코드 브레이커, 귀신'

라이스 샤워는 크게 주목 받지 않았지만, 조금씩 기록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부르봉에게 매번 지더라도 차이가 좁혀지는 중이었고요. 그리고 가장 소질 있는 장거리 경주에서 마침내 첫 G1 경기 우승을 따낸 겁니다. 하지만...

경기장 분위기는 차가웠습니다. 12만 관중의 눈앞에서 대기록이 산산이 깨졌고, 관서 말의 기록을 관서 경기장에서 관동 말이 부쉈다는 것도 악감정에 불을 붙였다고 전해집니다. 다음 날, 신문 기사 제목은 '라이스 샤워 승리'가 아니라 '부르봉 3관 좌절'이었습니다. 

클래식 우승을 차지하고도 박수 받지 못한 라이스 샤워는, 이듬해 최고의 텐노상 봄(G1)에 출전합니다. 여기서 공교롭게도, 또다른 대기록을 앞둔 명마 메지로 맥퀸을 만나게 됩니다.

맥퀸은 당대 최강의 스테이어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재작년과 작년 이 대회를 모두 승리하면서 2연패를 달성했죠. 이번에 다시 이길 경우, 역사상 단 한번도 없었던 '3년 연속 텐노쇼 봄 우승마'의 탄생입니다.

경기 당일, 라이스 샤워는 무려 12kg가 감량된 채 날카로운 모습으로 트랙에 섰습니다. 맥퀸을 꺾기 위해 한계까지 훈련을 거치고 돌아온 겁니다. 

이때 서슬 퍼렇게 비치던 안광은 훗날 공식 CM에서까지 연출로 쓰일 만큼 강렬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레이스가 벌어지는 곳은 바로 부르봉이 3관 기록을 앞두고 저격당했던 교토 경기장. 관중들 입장에서 작년의 '악몽'이 오버랩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시작된 경기, 맥퀸은 선행으로 달린 끝에 마지막 4코너를 돌면서 선두로 나섭니다. 하지만 환호성도 잠시. 바로 뒤를 작고 검은 그림자가 따라붙었습니다. 라이스 샤워였습니다.

이어 최종 직선 코너에서, 라이스 샤워는 역사에 남을 스퍼트를 보여주면서 맥퀸을 제칩니다.

결국 라이스 샤워가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경기장은 환호가 아니라 비명으로 가득 찼습니다. 라이스 샤워의 시상식에서는 축복이 아닌 야유가 쏟아졌습니다. 사람들은 라이스 샤워의 우승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맥퀸의 3연패 실패를 안타까워했습니다. 대기록을 연속으로 깨버린 어느 레코드 브레이커를 향한 비난과 함께요.

부르봉과 맥퀸을 꺾을 때 라이스 샤워는 모두 코스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분명 엄청난 질주를 해냈지만, 그 축복의 이름은 그저 자객이자 악역으로 불렸습니다.

"힐(악역)인가, 히어로인가"
- JRA 텐노상 봄 '라이스 샤워' CM 문구

격한 훈련의 후유증이었을까요. 어쩌면 사람들의 야유를 듣고 있었을까요. 이후 라이스 샤워는 귀신 같이 침체의 늪에 빠집니다. G1 우승은 커녕 중상 경주에서도 순위권에 들기 어려워지는 현상이 2년 가까이 이어진 겁니다.

스포츠에서는 종종, 악역으로 이길 때마다 손가락질을 받다가도 갑자기 무력해지면 걱정과 응원의 목소리가 늘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도 비슷했죠. 대기록을 깰 때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의 눈초리는 조금씩 사그라들었습니다.

그런 라이스 샤워가 1995년 텐노상 봄에 다시 출전했습니다. 맥퀸을 꺾은 뒤 2년 만에 선 자리였죠. 힘을 잃었지만 한때 최고 스테이어로서 체력은 남아 있었습니다. 마토바 기수는, 3코너부터 스퍼트를 시작해 앞으로 나서는 극단적 승부수를 겁니다.

"맥퀸도, 부르봉도 응원하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모습을 중계하던 스기모토 아나운서가 남긴 멘트입니다. 당시 강자들이 모두 은퇴한 가운데, 마지막까지 다시 승리를 향해 뛰는 라이스 샤워를 향한 시선은 이미 달라져 있었습니다.

접전 끝에 라이스 샤워는 10cm 차이로 1착을 해냈습니다. 세 번째 G1 우승이자 텐노상 봄 2회 우승. 경주마로서 노장인 6세의 나이에 다시 재기에 성공한 스토리를 지켜보며, 과거를 기억하는 관중들은 이제 박수와 찬사를 보냈습니다.

먼고 먼 길을 돌아, 마침내 영웅이 된 겁니다.

긴 시간을 견뎌내 결국 박수를 받은 라이스 샤워
긴 시간을 견뎌내 결국 박수를 받은 라이스 샤워

라이스 샤워는 상반기 그랑프리인 타카라즈카 기념을 앞둔 인기투표에서 압도적 1위에 올랐습니다. 원래 쉴 생각이었지만, 중거리 실적을 위해 한 경기만 더 뛰기로 결정하게 되죠. 이번 경기만 마치고 라이스 샤워는 종마로 전업해 여생을 보낼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기가 열린 날은 라이스 샤워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4코너를 앞두고 말은 쓰러졌습니다. 원인은 앞다리에 심각한 개방골절. 회복이 불가능하고 최대한 조치를 하더라도 평생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증상입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현장에서 안락사가 결정되고 맙니다. 이런 비극 때문에 팬들의 뇌리에 더욱 기억될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

라이스 샤워 원본마의 묘지 (출처: 위키피디아)
라이스 샤워 원본마의 묘지 (출처: 위키피디아)

우마무스메 IP로 들어오면서, 비극적 결말은 당연히 언급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전까지의 이야기는 게임과 애니메이션에서 높은 비중으로 등장하죠. 주연급 캐릭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본마가 서러브레드 품종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온순하고 성실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를 반영하듯 착하고 조용한 캐릭터로 만들어졌습니다. 작은 몸집, 검은 의상도 외형을 십분 반영했고요.

특히 그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애니메이션 시즌2입니다. 부르봉과 맥퀸을 꺾고 사람들의 야유를 받는 이야기가 그대로 등장하죠. 특히 맥퀸을 이기는 텐노상 봄 레이스는 작중 최고의 연출로 찬사를 받은 장면입니다.

부르봉 원본마는 킷카상 패배 직후 부상에 시달리다 은퇴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라이스의 중요한 조력자로 자리잡는 것도 재미있는 점입니다. 

"또 많은 꿈을 부수고 말았어요"

"그게 이긴다는 거예요. 승부니까요. 누군가 이기면 누군가는 상처받고 꿈이 깨지죠. 하지만 언젠가, 이게 환희와 축복의 목소리가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거예요. 당신의 이름은 라이스 샤워니까요."

이 말의 사연에 안타까움을 느낀 팬들이라면 부르봉이 건넨 말에 울컥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2년 뒤 박수 받는 라이스까지 스토리에 담진 못했지만, 이 말을 통해 앞으로의 일이 마냥 어둡지만은 않다는 것을 암시하죠.

우마무스메 게임에서는 메인스토리 2장이 라이스 샤워의 이야기입니다. 출시 버전부터 열려 있으니 반드시 감상해야 할 필요가 있고요. 스토리 보상으로 받는 라이스 서포트 카드도 특성을 반영해 장거리 스태미너 특성이고, 약 반년 뒤 출시되는 2차 카드 역시 최고의 회복기인 원호의 마에스트로를 줍니다. 

단, 게임에서 단점이 있습니다. 고증을 워낙 잘 반영해서 우마무스메 육성 난이도가 굉장히 높다는 겁니다. 반드시 이겨야 할 부르봉과 맥퀸의 능력치를 살펴보면 '라이스 당신은 대체 어떤 싸움을' 같은 말이 자동으로 나오게 되죠.

육성을 클리어해도 여러 콘텐츠에서 유용한 성능은 아니기 때문에, 3성 선택권을 섣불리 라이스에 사용하는 일은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애정과 노력이 들어간다면 쓸 수 없는 말은 존재하지 않지만요.

축복의 이름을 가졌고, 악역으로 비난 받았고, 긴 부진을 씻고 마침내 영웅이 되었지만, 그 순간 마생을 마감해야 했던 경주마.

그 이야기는 사람들의 기억과 기록을 통해 전해져 왔고, 우마무스메 서사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더욱 널리 전해졌습니다. 캐릭터 인기투표마다 1위를 독차지한 이유도 캐릭터 자체의 귀여움과 함께 스토리의 힘이 컸고요.

마지막으로, 게임 육성 시나리오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생애 마지막이었던 타카라즈카 기념을 우승하고 나면, "달릴 수 있어서 좋았어"라며 울먹이는 라이스 샤워와 함께 "너는 우리 모두에게 푸른 장미야"라는 트레이너의 대사가 들어갑니다.

원본마와 캐릭터에게 정성을 다해 존중을 표현하는 모습이 바로, 우마무스메의 이야기를 더 감동적으로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요.

 

(NEXT - ③ 나이스 네이처 - 마치 우리 같은, '3'이라는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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