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녀물을 넘어 '스포츠 드라마'가 거기 있었다
[게임플]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는 일본의 실존 경주마들을 미소녀화한 게임입니다. 어떻게 이런 신기한 발상을 했느냐는 경악,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와 매출로 충격을 선사했죠. 카카오게임즈의 국내 서비스 발표로 기대감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비결은 캐릭터, 그리고 그 캐릭터들에 얽힌 서사에서 나옵니다. 하나의 스포츠 드라마를 보는 듯한 몰입감은 애니메이션에 이어 만화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매주 주요 캐릭터의 원본마 스토리를 살펴보고, 이것이 어떻게 IP로 재해석됐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존 팬들에게는 이야기를 되새기는 즐거움을, 입문자들에게는 캐릭터 이해와 새로운 스토리에 대한 재미를 드리려 합니다.
우마무스메가 등장했을 때, 서브컬처 좀 파봤다 하는 사람들도 "이건 좀..."이라며 고개를 젓곤 했습니다. 인류에게 너무 이르다 싶은 아이디어였거든요.
한국어로 직역한 '말딸'이라는 별칭으로도 널리 알려졌는데요. 말 귀와 꼬리를 단 인간형 미소녀들이 달리기 시합을 벌이고, 레이스가 끝나면 아이돌 공연까지 해요. 기괴하다거나 버티기 힘들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합니다. 저 역시 그러던 시기가 있었죠.
출시일에 무심코 게임을 설치한 이유도 "대체 어떤 괴작이 나왔을지 구경이나 해보자"는 호기심이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8개월이 넘은 지금까지 매일 출석하게 될 줄이야.
경주마를 옮겼더니 독자적 이야기가 나온다?
알려졌다시피, 우마무스메는 일본 경주마들을 모티프로 만들어진 IP입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후반 사이 활약한 경주마가 다수입니다. 타이틀 메인에 걸린 스페셜위크, 사일런스 스즈카 등은 '황금세대'로 불리는 90년대 후반 활약한 명마들이고요.
게임은 그들의 여정을 3년간의 파워프로 방식 육성 콘텐츠로 풀어냅니다. 각 해는 주니어, 클래식, 시니어로 불리며 최후반 엔딩을 앞두고 결전을 치르게 되죠. 초기 시나리오 URA 파이널은 물론, 9월 추가된 신규 시나리오 아오하루배 역시 기본 틀은 비슷합니다.
이는 경주마 대다수가 겪는 과정을 육성 구조에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주니어에서 육성과 데뷔전을 치른 뒤, 3세가 되면 모든 3세 말만 참여할 수 있는 클래식 시즌에 들어섭니다. 사츠키상, 일본 더비, 킷카상으로 구성된 클래식 3관 코스를 비롯해 또래 말들과 경쟁하며 자신의 혈통과 자질을 증명하게 됩니다.
육성 모드에서 고르는 캐릭터에 따라서는 각자의 개별 시나리오가 펼쳐집니다. 중간 미션, 경쟁 캐릭터, 세부 이벤트까지 모두 달라지는데요. 이 모든 것은 원본 경주마의 특성과 성적을 반영해 우마무스메 세계관 속 서사로 흡수됩니다.
놀라운 점은, 스포츠로서 경주마들의 세계가 생각 이상으로 방대하다는 겁니다.
다른 종목에서 전설적인 선수와 라이벌이 있고 몰락과 재기의 스토리가 있듯, 경주마들 역시 각자 배경에 따라 환희와 좌절의 이야기가 교차해왔거든요. 우마무스메는 이 모든 것을 아카이브로 활용해 철저한 고증을 섞었습니다.
경주마의 전성기는 길어야 2~3년, 활동기간 전체로 봐도 4년이 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딸 유니버스'에서는 트레센 학원이라는 공간에 모든 시대 캐릭터들이 모였죠. 그들은 서로 어우러지는 이야기와 관계망을 만들어냅니다.
처음엔 기괴한 발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거대한 발굴을 해낸 셈입니다.
이 세계관에서는 현실의 마권 배팅도 없고, 철저하게 스포츠로 대하는 관중들과 '선수 우마무스메'들이 있습니다. 몇십년 간 스포츠 스토리가 하나의 드라마로 함축됐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건, 재미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원본마 정보를 몰라도, 순수 감동과 눈물의 스포츠물
우마무스메는 게임뿐 아니라 애니메이션과 만화 등 각종 미디어 프랜차이즈로 IP를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미소녀화했지만 미소녀물로 보긴 어렵습니다. 스포츠물에 가깝죠.
애니메이션은 시즌1에서 무난하게 세계관을 설명하더니, 시즌2에 접어들자 무수한 호평을 받아내면서 추천작 반열에 올랐습니다. 감동적인 스토리와 연출, 캐릭터마다의 군상극을 청춘 스포츠 관점에서 절묘하게 엮어냈기 때문입니다.
핵심 포인트는, 원본 이야기를 전혀 알지 못해도 그저 단독 시나리오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시즌2 주인공인 토카이 테이오의 감동 드라마를 울면서 감상한 다음 "이게 어떻게 실화?"라면서 깜짝 놀라는 현상이 벌어지는 거죠.
'이런 게 대중화되지 않은 한국에서 흥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부정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극소수 빼고는 원본 말들을 알지도 못했을 국내 유저들이 어떻게 일본 출시 초기부터 열광했겠어요.
원본 경주마들을 최대한 존중하고 대우해주는 태도에서도 좋은 감성이 나옵니다. 심각한 부상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경주마들은 그것을 극복하는 스토리나 특수 멘트가 들어가고, 성적 어필 역시 심각한 수준은 자제합니다. 원본 마주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지만 말이죠.
캐릭터 과몰입이 은퇴마들을 구하다
우마무스메 열풍은 실제 경주마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린 세대가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은퇴마 처우 개선이 큰 화제로 떠오르면서 여론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우마무스메 캐릭터 원본마들이 지금 시점 대부분 사망했거나 은퇴마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최상위를 제외한 대부분의 경주마가 은퇴 이후 생존이 위태롭다는 점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습니다.
대표적 사례가 지난 4월 있었습니다. 우마무스메 인기 캐릭터 중 하나인 나이스 네이처 원본마의 33세 생일을 기념해 은퇴마협회의 후원 모금이 있었는데요. 전년 대비 무려 20배에 달하는 3천 5백만엔(3억 6천만원) 가량의 모금액을 달성하면서 은퇴마 지원을 위한 비용으로 소중하게 사용됐습니다.
우마무스메가 게임계에, 나아가 콘텐츠 시장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분야라도 거대한 스토리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캐릭터 소화를 어떻게 시키느냐에 따라 충분히 '멋져질' 수 있는 분야입니다.
경주마 역사가 아무리 크다 해도, 옛 이야기들은 세대가 흘러갈수록 자세한 사연이 잊혀질 수밖에 없었거든요. 스토리 메이킹 관점에서 아까운 자료가 휘발되는 셈입니다. 과거로 묻힐 뻔한 승부의 세계와 사연의 주인공들은 이 '말딸 유니버스'에서 새로운 서사로 거듭났습니다.
캐릭터는 이야기를 담는 그릇입니다. 그 이야기는 감정을 움직이곤 하죠. 원본으로 숨어 있던 자료를 캐와서 공감의 드라마로 엮어내는 작업은, 앞으로도 생각지도 못한 분야에서 다시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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