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울리'가 심어둔 씨앗, 2023년 '울라리' 밈 히트 시작
줄임말로 벌이는 'WWE'는 유구한 역사... 그 또한 재미

(자료화면: 치지직 '철면수심' 채널 다시보기)
(자료화면: 치지직 '철면수심' 채널 다시보기)

"방4업 울라리 한 부대 나왔네, 테란이 배루저로 쏴도 안 죽겠는데?"

지난 주말, 치지직 플랫폼에서 스트리머 철면수심이 개최한 스타크래프트 대회 '차도르 컵'이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치지직에 돌고 돌아온 스타크래프트 유행과 함께, 저 세상으로 가버린 신종 줄임말을 처음 본 유저들의 채팅 반응도 또다른 재미를 줬다. 

'울라리'는 울트라리스크를, '배루저'는 배틀크루저를 줄인 말이다. 언제나 울트라와 배틀로 불러온 유닛들이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마음대로 줄이기'는 공식처럼 됐다. 어쩌다가 이렇게 올드 팬들을 화나게 만든, 그리고 화를 내는 모습이 재미있어 더 쓰게 만드는 줄임말이 탄생했을까.

울라리 밈의 기원은 2021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디시인사이드 어느 글에서 한 유저가 저그 건물을 이야기하면서 '울리' 뽑는 곳이라는 글을 적으며 시작됐다. 울트라리스크를 아무 근본 없는 줄임말로 부르는 모습에 다른 유저들의 욕설과 분노가 몰아쳤고, 그 모습 자체가 유머로 남으면서 '울리'가 처음 퍼지게 됐다.

그리고 2023년, 커뮤니티 어딘가에서부터 '스타크래프트 단일 생명체 최강의 존재'라는 글이 나타났다. 현재 남은 자료로는 개드립으로 추정된다. 울트라리스크의 거대하고 강력한 삽화가 웅장하게 스쳐지나간 뒤, 마지막에 단 세 글자 "울라리"가 붙는 이 글은 순식간에 모든 게임 커뮤니티로 퍼져나갔다.

너무나 강력한 세 글자
너무나 강력한 세 글자

■ "화를 내는 순간 진다"

반응은 격렬했다. "울리까지는 그렇다 치는데 울라리는 진짜 못참겠다", "뜬금없이 이름이 귀여워서 터졌다", "아콘이 더 강한데 무슨 소리냐" 등 웃음과 분노가 엇갈렸다. 사람을 긁기 위해서라면 완벽한 성공이라는 평가는 공통적으로 나왔다.

분위기에 불이 붙으면 억지로 뒤틀기 놀이는 끝없이 이어진다. 울라리와 울리스, 여기서 더 변형된 '울스크'는 사실상 싸우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를 바 없었다. 급기야 '오버로드'를 '오로'라고 줄이는 극한의 이단이 나타나자, 웃던 사람들이 "적당히 해라"며 정색하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포인트는 어떤 줄임말이 맞는지가 아니다. '울라리'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머리를 감싸쥐며 '울트라'가 맞다고 열변을 토하는 이들을 구경하는 것까지가 재미 포인트다.

초창기 '울리'에도 사람들이 적응하던 타이밍에 울라리가 출현한 것 역시, 누군가의 반응을 보고 싶다는 심리가 기반에 있다. 히드라리스크도 어느덧 '히라리'가 됐고, 뮤탈리스크는 풀 네임부터 '라'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뮤라리'가 되어버리는 기현상이 나와 태클을 참기 어렵게 만든다.

이 간악무도한 놀이는 조금씩 게임 밖으로 퍼졌다. 2024년 들어 유명 IT 유튜버 잇섭은 갤럭시 울트라를 울라리로 부르는 만행을 영상에 담으면서 이 밈을 모르던 시청자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더 시간이 흐르자, 새로 스타크래프트를 시청하는 입문자가 "원래 줄임말이 울라리 아니었냐"고 말하는 등 올드 유저들이 뒷목을 잡는 그림이 쉬지 않고 나온다.

'울라리'가 '에게리'로 번진 시점
'울라리'가 '에게리'로 번진 시점

■ 자 따라해봐, '에바' / 응 '에게리'

이제 스타크래프트만 해당사항이 아니다. 어느 작품이든 무근본 줄임말의 공포를 맞이하게 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줄임말은 1990년대 당시부터 전 세계 공통 '에바'였다. 그러나  2024년 8월 '승리의 여신: 니케'와 콜라보가 발표되자, 이 올드 IP를 낯설어하는 유저들 사이에서 '에게리'라는 신조어가 탄생한다. 스타크래프트와 에바는 교집합이 크지 않았고, 면역 없이 파멸적 줄임말을 맞닥뜨린 에바 팬들은 충격에 빠졌다.

"울라리는 그러려니 했는데 에게리는 많이 긁힌다"고 호소하는 기존 팬들을 비웃듯 이 용어는 순식간에 퍼졌다. '반게리'와 '에리온' 등 변형도 끊임없이 생산됐다. 급기야 시키나미 아스카 랑그레이를 '시아랑'으로 부르는 모습에 수많은 국내 아스카 팬들이 밤잠을 설쳤다는 일화가 있다.

연쇄 작용으로 다른 게임들에도 줄임말 뒤틀기는 계속된다. 예를 들어 님블뉴런의 '이터널 리턴'은 언젠가부터 '이터리', '이널턴'으로 줄여 화를 유도하는 유저가 슬금슬금 늘기 시작했다. 그동안 합의된 줄임말은 '이리'였지만, 누가 규정을 둔 것도 아니니 이쯤이면 될 대로 되라는 분위기로 흐르기 마련이다.

여전히 세대를 초월해서 하거나 보고 있는, 그야말로 민속놀이
여전히 세대를 초월해서 하거나 보고 있는, 그야말로 민속놀이

■ 왜 시작이 스타크래프트였을까 - 언어 세대차이의 비틀기

족보 없는 줄임말 밈이 스타크래프트부터 퍼진 이유는 무엇일까. 스타크래프트 1편은 30년이 되어가는 게임이다. 이런 과거 게임이 지금까지도 폭넓은 게이머들에 친숙하게 소비되는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물다. 그만큼 실제 플레이어, 스트리머, 시청자 모두를 통틀어 내부에 엄청난 세대 격차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에반게리온도 마찬가지다. '에바' 열풍 초창기를 대학 시절에 일본에서 바로 직수입해 겪은 사람은 현재 높은 확률로 50대다. 사춘기쯤 접했다 해도 40대다. 콜라보레이션 등으로 최근 '에게리'를 겪은 '신세대 오타쿠'와 3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날 수도 있다.

실제 커뮤니케이션에서 내부 연령 격차가 크면 사용하는 용어 자체도 자연스럽게 갈라진다. 이 틈을 파고드는 것이, 논리 없는 신조어를 지어내 올드 팬 반응을 지켜보는 콘텐츠다. 여기서 화를 내면 진다. 단, 반응하지 않는다고 이기는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유리한 가불기인 셈이다.

'롤'에서는 이 녀석을 뭘로 줄여 부를지로 10년 넘게 싸우고 있다
'롤'에서는 이 녀석을 뭘로 줄여 부를지로 10년 넘게 싸우고 있다

줄임말을 둘러싼 농담 따먹기 분쟁, 소위 'WWE'는 예전부터 유구한 역사를 가졌다. 리그 오브 레전드 챔피언 트리스타나는 줄임말이 '트타'냐 '트리'냐를 두고 D점멸과 F점멸급 논쟁이 길게 이어져왔다. 급기야 '트스'와 '타나'까지 나와버리는 대유쾌 혼돈이 벌어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 블리츠크랭크는 자기들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 분위기다. '블리츠'부터 시작해 '블츠', '블리', '블랭', '블크' 등 사람마다 줄이는 방식이 다르다. 정답이 없는 문제다. 그리고 서로 투닥이는 모습은 그 자체로 또다른 재미가 된다.

역사는 돌고 돈다. 처음부터 근본 있는 줄임말이란 없었다. 부르기 편하면, 재미있으면, 혹은 귀여우면 그것은 공식이 된다. 앞으로도 상상하지 못한 줄임말의 출현을 기대한다. 지금 '발로란트'를 즐기는 세대가 훗날 시간이 흘렀을 때, '발란'이라는 단어를 보고 "이런 기분이었냐"며 고통에 잠기는 풍경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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