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가까웠기에 잊고 있던 존재감, 스스로 무한히 써내려가는 역사

[게임플] e스포츠 역사에서 가장 먼 곳까지 달려갔고, 가장 오래 달렸다. 그리고 '페이커' 이상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빨리 달리고 있다.

2013년, 페이커의 데뷔전을 현장에서 지켜보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고전파'라는 닉네임을 가진 한 소년은 모든 팀이 영입을 탐내는 솔랭 괴물이었다. 결국 SKT T1에서 영입에 성공해 루키 팀을 구성했고, 데뷔 시즌에 첫 롤드컵 우승을 달성했다. 그것은 역사의 첫 페이지에 불과했다.

압도적인 실력과 더불어 슈퍼스타의 기운도 타고났다. 2013년 서머 결승에서 2패 후 2승으로 따라붙은 뒤, 당시 블라인드 픽으로 열린 5세트에서 아직도 재생되고 있는 '제드 대 제드' 명장면을 탄생시켰다. 두 번째 대회 만에 첫 우승이었고, '페이커'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최초의 순간이었다. 

10년 뒤 2023년, 페이커는 여전히 T1이었다. 여전히 매번 결승에 올랐고, 결국 네 번째 월즈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개인으로서 유일무이한 수상 기록이다. 데뷔를 함께 한 동료들은 이미 선수 생활이 끝난 지 오래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기에 오히려 실감하지 못했지만, 사실 페이커의 10년간 업적과 퍼포먼스는 한참 전부터 비현실적이었다. 비교할 다른 대상이 없기 때문에 무엇에 비교해도 저평가가 되는 현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2016년 SKT T1 시절 페이커
2016년 SKT T1 시절 페이커

그래서일까. 그동안 페이커는 대회 하나를 실패할 때마다 무수한 증명의 요구를 받아야 했다. 

한때 20대 중반은 프로게이머에게 은퇴를 생각해야 할 나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에이징 커브'라는 말이 당연한 상식처럼 들려왔고, 한 게임 부진하면 바로 온갖 SNS와 커뮤니티에서 그를 두고 수많은 말이 나왔다. 부진에 대한 잣대도 까다로웠다. 

하지만 페이커는 10년 내내 증명을 해냈다. 이번 우승을 빼더라도 이미 롤드컵 3회 우승과 2회 준우승, MSI 2회 우승, LCK 10회 우승, 최근 LCK 5연속 결승과 바로 직전 롤드컵 결승까지. 통산 기록에서 비교 대상이 없으며 최근 역시 손에 꼽는 활약을 펼쳤다. 10년 동안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한 해는 2018년 단 하나뿐이었다. 

모든 스포츠에서, 스타의 자리에 오르면 특별한 이유 없이도 안티가 같이 생긴다. LoL 씬도 마찬가지다. 그중에서도 페이커는 유독 지독하게 시달렸다. 워낙 오래 굴곡이 없었고, 이적 없이 명성을 쌓았고, 항상 LCK 경기장에 있었다. 언제나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 간혹 그 존재감을 무던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페이커가 어떤 선수인지는 해외로 갈 때 체감할 수 있다. 지난 아시안게임이 열린 항저우에서 페이커를 한 번이라도 보겠다며 대륙을 횡단해 찾아온 수많은 팬들,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이어선 해외 스포츠 선수들, 모든 조명을 집중시킨 국내외 매스컴의 모습은 상징적이었다. 

이번 2023 월드 챔피언십 우승은 스스로 본인의 신화를 되새기게 만들었다. 리그 오브 레전드가 망하는 순간까지 깰 수 없을 듯한 기록을 다시 세웠다. 

10년 전처럼 스토리도 따라왔다. 4강 속 LPL 3팀에 홀로 남은 한국 팀 T1, 그리고 8강, 4강, 결승에서 LPL 소속 상대들을 릴레이 완파, 가장 강력한 적과 싸운 4강에서 불리한 전황을 뒤집은 슈퍼플레이. 기존 e스포츠 팬을 넘어 한국 전역이 이 왕도에 열광했다. 이것은 타고난 운명과 함께 재능, 노력, 멘탈이 함께 할 때 나오는 스토리였다. 

페이커 없는 미래가 두려워지는 시기도 있었다. 지난 서머 손목 부상으로 잠시 이탈했을 때 T1은 연패를 거듭했고, LCK 뷰어십은 심각할 정도로 폭락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앞으로 한참 미뤄도 될 것 같다. 아직 페이커가 있어야 하는 리그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우리는 아직도 페이커가 있는 리그다.

e스포츠의 선구자 임요환은 "30대 프로게이머"를 꿈꾼다고 말해왔다. 서른이 넘어 스타크래프트2 본선에 진출하며 꿈을 이뤘다. 단순히 숫자로서의 성취감이 아니었다. 이 직업이 오랜 기간 유지할 수 있고 누구든 해낼 수 있다는 것을 후배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의도였다.

임요환이 씨앗을 심었고, 같은 팀을 계승한 페이커가 꽃을 피웠다. 서른 살이 넘어서도 "아직, 나야"라며 또다시 커다란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을까.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페이커는 불가능을 보여준 적이 없는 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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