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메인 포지션 차지한 '버튜버'... '홀로라이브' 파워는 상상 이상
게임 중 '프로세카'의 압도적 존재감, 게임별 구매 패턴도 흥미로운 차이
'블아'와 '니케'의 자리잡기, 새로운 흐름에 직격 맞은 정통 아이돌물
일본 서브컬처의 판도가 뒤집어져 있었다.
도쿄에 방문할 때마다 반드시 한 번은 들르는 곳이 있다. 아키하바라다. 일본 최대 IT 상업지구이자 '오타쿠 성지'로 불린다. 세상 모든 마니아들의 취미 용품이 여기 모인다. 특별히 무언가를 구매하지 않아도, 구경만으로 현재 분위기를 파악하고 앞으로 대세를 읽기 충분하다.
12월 30일, 평일 오전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아키하바라 역 앞은 인파로 가득 덮였다. 주변 모든 음식점은 줄을 서야 했다. 연말 연휴와 연결된 금요일이고, 다음 날 이어지는 코믹마켓도 시너지를 낸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 찾아와도 한적한 거리란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이곳의 특징이기도 하다.
애니메이트, 게이머즈 등 유명 점포의 첫 층을 보면 현재 최고 인기 IP를 알 수 있다. 이번 대세는 여러 점포를 지나갈 때마다 확실하게 인상이 잡혔다. 게임도, 애니메이션도 아니다. 대규모로 펼쳐진 코너마다 '홀로라이브', '니지산지' 등의 로고가 캐릭터 옆에 박혀 있었다.
확실히 체감된다. 지금 일본은 버튜버의 시대였다.
■ 버튜버는 유행을 넘어 시대 자체가 바뀐 것 아닐까
점포마다 가장 넓은 공간에 홀로라이브 코너가 자리잡고 있다. 상품을 구매하기 위한 인파도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다. 음반부터 캐릭터 굿즈, 가챠퐁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심지어 대형 잡화점 프랜차이즈인 돈키호테에서도 홀로라이브 코너는 무조건이라고 할 만큼 하나씩 자리잡았다.
재미있는 점은 외국인 손님이 여느 코너보다 많다는 것. 영어나 그밖의 서구권 언어로 대화하며 물건을 대량으로 주워담는 일행이 흔하게 나타난다. 일본과 영어권에서 상상 이상의 인기라는 소식은 거짓이 아닌 듯했다.
니지산지도 홀로라이브만큼은 아니지만 어디나 보인다. 특히 여성향 위주 층에서 구매 행렬은 여타 IP를 능가한다. 차마 언급하기 힘든 어떤 곡으로 인해 국내 마니아들에게도 잘 알려진 '시구레 우이'의 상품도 예상보다 많이 발견됐다.
홀로라이브가 본격적인 IP 사업과 버튜버 아이돌화를 시작한 시기는 2019년경이다. 약 5년 만에 서브컬처 최대 소비층을 구성했고, 그밖의 버튜버도 존재감이 컸다. 이쯤 되면 버튜버는 한때 유행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으로 받아들일 때로 보인다.
■ 프로세카, 일본의 '서브컬처 게임 인싸' 픽
게임 중에서는 '프로젝트 세카이: 컬러풀 스테이지(프로세카)'가 단연 1선발이었다. 홀로라이브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매장에서 1층을 점거했고, 돈키호테에도 상품이 도배된 IP다. 하츠네 미쿠는 물론 다양한 캐릭터가 골고루 배치됐고, 점포 모니터에서 뮤직비디오가 나온다면 십중팔구 '프로세카'일 정도다.
프로세카가 무서운 점은 고객층이 유독 젊다는 것, 특히 게임과 같이 성비도 균형을 맞춘다는 것이다. 여성향 코너를 제외하면 삼삼오오 모여 상품을 둘러보는 여학생들이 가장 많은 코너다.
잠시 둘러본 경험으로 속단하기 이르지만, 외국인보다 현지 손님이 많아 보인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특히 음반 진열이 아주 넓고 손님도 많다. 근처 점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도 찾아보면 프로세카 곡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원신'도 상품 판매가 매우 많은 게임 중 하나다. 이쪽은 반대로 외국인 관광객들이 카트를 들고 찾아오는 모습이 잦다. 종류도 많고, 큼지막한 상품을 구매하는 빈도가 높다. 짧은 영어로 듣기에는 일본에서만 구매 가능한 굿즈가 많은 듯했다.
일본이라 가능한 풍경도 감상했다. 현지 국민게임 중 하나인 '에이펙스 레전드' 굿즈도 생각보다 많다. 이것이 아키하바라와 어울리겠느냐 싶을 수도 있지만, 정말 많다. '마인크래프트'나 '어몽 어스'처럼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게임의 상품도 자주 보인다.
일본 서브컬처 게임 강자들도 굳건하다. '페이트' 시리즈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고, '헤븐 번즈 레드'도 현지 인기가 높은지 애니메이트 코너 존재감이 컸다. '우마무스메'를 비롯한 사이게임즈 상품은 어느 매장마다 안정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은 '그랑블루 판타지'가 대형 캠페인을 진행 중이라 관련 현수막도 많이 보인다.
■ 한국 게임 '블아'와 '니케', 이제는 어엿한 터줏대감들
마지막으로 찾아온 5년 전엔 상상할 수 없었던 모습도 있다. 이제 한국 게임 굿즈를 발견하는 것은 '블루 아카이브'와 '승리의 여신: 니케' 덕에 신기한 일이 아니다. '니케'는 피규어 선호도가 높은 듯, 점포마다 잘 보이는 곳에 한 칸씩 진열대가 있다.
블루 아카이브 상품은 다양하거나 규모가 크진 않았다. 대신 코너 규모 대비 찾아오는 인파는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최근 출간된 아트웍스 제2권은 여러 손님이 실시간으로 집어서 구매대로 향하는 진풍경이 나오기도 했다.
굿즈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기 버거운 듯했다. 이 역시 2차 창작 공급이 쏟아지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느꼈다. 그리고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유독 블루 아카이브와 '우마무스메'가 옆에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 전통 아이돌 IP들의 축소... 애니-게임-버튜버 3분할 체제로
채워지는 것들이 있다면 당연히 줄어드는 것도 있다. 과거 하키하바라 한켠을 차지했던 일본 현실 아이돌은 희귀해졌다. AKB48 전문 샵이나 굿즈 코너도 이제 찾기 어렵다. 라디오회관도 그 자리는 K-POP 그룹들이 점령했고, 방문객도 많다.
'아이돌 마스터'나 '러브라이브' 등 기존 아이돌 IP 강자들도 슬슬 세월의 흐름에 밀려나는 분위기다. '뱅드림'은 그래도 어느 정도 자리를 유지하지만, 역시 5년 전 아키하바라를 호령하던 그 위용은 찾기 어려워졌다. 프로세카와 버튜버의 대흥행으로 인한 반동이 아닐까 싶다.
아키하바라 주요 매장을 돌아다닌 서너 시간 동안, 서브컬처 종주국 일본의 구도가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오랫동안 게임과 애니메이션의 두 분류로 나뉘었다면, 이제 버튜버가 그에 못지 않은 크기로 떠오르면서 3종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올 때마다 게임 비중이 커져가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특히 여성향 상품은 사실상 게임 IP가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침 게이머즈 이벤트 층이 '앙상블 스타즈' 판매 기간이라 더욱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게임 원작의 애니화가 당연시되고, 이를 다시 게임 IP의 확장으로 풀어내는 움직임이 나온다.
10년이 아니라 3년이면 강산이 바뀌는 분야가 서브컬처다. 관전자 혹은 연구자의 입장에서, 5년 만에 찾아간 아키하바라는 흥미로운 대격변을 느끼기 충분했다. 다음 방문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그때 어떤 변화가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 궁금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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