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버스 컴퍼니, 니케, 산나비, 블루 아카이브, 로스트아크, 스테퍼 케이스

이야기로 감동을 주는 게임이 가득한 해였다. 돌아보니, 대부분 한국 게임이었다.

3년 전만 해도, '스토리텔링의 실종'은 한국 게임을 관통하는 문제점이었다. 성장이나 경쟁에 치중된 게임이 대세였고, 그 가운데 스토리 파트를 불필요하게 여기는 업체도 흔했다. 매출은 성장세지만 한국 게임 선호도는 젊은 유저층에서 점차 줄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해외 게임의 공습은 거셌다. 

2023년은 '한국 게임이 이야기를 되찾은 해'로 정의할 수 있다. 세계적인 게임 풍년 가운데서도 유독 강렬한 스토리를 게임 속에 선보였다. 특히 고전을 면치 못했던 서브컬처에서 빛났고, 소규모 게임에서도 뜻밖의 복병이 등장했다. 이는 한국 게임을 향한 믿음이 조금씩 돌아오게 만드는 결과로 나타났다.

■ 림버스 컴퍼니 - 문학의 게임화, 여기서 정점으로

올해 가장 강렬한 스토리를 보여준 게임은 무엇일까. 하나만 꼽으라면 '림버스 컴퍼니'다. '로보토미 코퍼레이션'부터 특이하면서 방대한 세계관을 쌓아온 프로젝트문은, 문학 작품을 소재로 한 수집형 게임의 묘미를 세계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한국의 문호 이상과 '구인회'의 시대를 다룬 메인스토리 4장은 림버스 컴퍼니 전성기를 알린 시기다. 숨 막히는 전개와 절정으로 치닫는 결말, 이를 뒷받침하는 연출과 음악은 모든 유저들에게 전율을 주기 충분했다. 한국 게임에서 한국 근대 문학사의 한 단면을 이렇게 멋진 작품으로 풀어냈다는 의미도 컸다.

4장이 정점일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5장 이스마엘을 중심으로 한 '모비 딕' 이야기는 꿈과 광기를 응축한 드라마였다. 성우들의 열연만으로도 감상 가치가 있고, 인게임 연출은 더욱 발전했다. 적어도 스토리에서 림버스 컴퍼니의 정점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 승리의 여신: 니케 - 놀랍게도, 게임 시나리오의 교과서

이에 못지 않은 게임으로 '승리의 여신: 니케'가 꼽힌다. 과감한 캐릭터가 궁금해서 해본 유저들이 스토리에 울고 빠져나오지 못하는 게임이다. 출시 극초기 준수하다는 평가는 받았지만, 올해 이 정도로 만개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메인 스토리뿐 아니라 종종 터져나오는 이벤트 스토리의 감동도 크다. 작년 12월 'MIRACLE SNOW'부터 시작해 0.5주년 'OVER ZONE', 1주년 'RED ASH'에 이르기까지 완성도가 높다. 여기도 가슴을 울리는 성우 열연으로 한국 성우들의 능력, 더빙의 중요성을 되새겼다.

'니케' 스토리 특징은 의외로 대중적인 감성이다. 서브컬처의 탈을 쓰고 있지만, 의외로 보편적인 코드를 내세운다. 추억과 가족, 인류와 사회적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가 완벽한 음악과 함께 어우러진다. 일본 대흥행에 이어 서구권 시장도 존재감이 빛난다. 아직도 성장세가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 내년 이야기도 궁금하게 만든다.

■ 산나비 - 감정을 일으키는 능력은 센스에서 나온다

1년간 게이머들이 텍스트를 읽으면서 가장 높은 확률로 눈물을 흘린 게임이라면, 니케 'MIRACLE SNOW' 더빙 버전과 '산나비'가 양대산맥이 아닐까. 2023년은 한국 인디 게임에서도 빛과 같은 이야기가 튀어나온 해다. 

미래 조선과 사이버펑크의 결합, 여기에 딸의 복수를 위해 나선 아버지의 이야기가 더해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분위기가 탄생했다. 그 시나리오는 수많은 방송인들의 눈물샘을 터트리는 결말로 완성됐다. 아주 파격적인 전개는 아니다. 하지만 결말에 다다르기까지 구성은 예상이 되면서도 피하기 어렵게 만든다.

게임 내러티브에서 연출 센스와 퀄리티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되새긴다. 도트로 그려낸 아름다운 배경과 액션, 텍스트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대사 말풍선 연출까지. 산나비는 2024년 두 개의 무료 DLC를 선보일 예정이다. 지금의 연출력이라면, DLC는 물론 후속작까지도 애타게 기대하게 만든다.

■ 블루 아카이브 - 일본 동인 팬덤의 역사를 다시 쓰다

'니케'가 대중적 감성을 건드린 서브컬처라면, '블루 아카이브'는 철저하게 서브컬처 본연의 감성을 파고들어가는 스토리다. 그 결과, 일본 게임시장에서 해외 게임으로 역대 최고의 코어 팬덤을 구축하는 IP를 만들어냈다.

인간의 창의력이 어디까지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캐릭터 메이킹에, 그 캐릭터를 토대로 웃음과 감동이 몰아치는 메인 스토리를 전개한다. 그리고 그동안 쌓아온 재료를 극한으로 '과몰입' 가능한 연출로 마무리한다. 올해 일본과 한국에서 공개된 1부 최종장은 그렇게 팬들의 찬사를 받으며 완성됐다. 

그 몰입과 캐릭터 개성은 동인 파워로 연결된다. 2차 창작 플랫폼마다 기록적인 규모를 세웠고, 30일 일본 코믹 마켓에서는 현지의 모든 IP를 압도적으로 제치는 부스 규모가 등장한다. 2021년 출시작이라 체감되지 않을 수 있지만, 블루 아카이브의 전성기는 바로 올해였다. 내년 역시 전성기가 이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 그밖에...

'로스트아크'가 8월 업데이트한 '운명의 빛'도 짚어볼 만하다. 예전과 같은 웅장한 전투와 화려한 연출은 비교적 적었지만, 어느 때보다도 밀도 높은 스토리 구성이 뇌리에 박혔다. 그동안 이어진 의문들이 대거 풀리는 동시에, 앞으로 전개를 위한 더욱 큰 복선이 깔리는 전환점이다.

인디 게임 중 '스테퍼 케이스'도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초능력자들의 범행과 수사라는 소재에서 흥미로운 가치관의 충돌을 묘사했다. 물론 추리로서의 이야기도 충실했고, 어떤 챕터는 전율을 안기기도 했다. 매우 작은 규모에서 만들어낸 가능성이다.

한국 게임만 스토리를 앞서나간 것은 아니다. 중국 게임 중 '원신'의 폰타인 마신 임무는 준수했고, 신작 '리버스 1999'의 서사와 내러티브는 손에 꼽힐 만하다. 서구권 콘솔에서는 '앨런 웨이크2'와 '사이버펑크 2077: 팬텀 리버티'가 인상적인 시나리오를 연출해냈다.

게임 스토리는 더 이상 '곁가지'가 아니다. 서브컬처 영역이 커지면서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됐다. 스토리를 잘 갖춘 게임이 실적도 잘 챙긴다. 문화 콘텐츠는 감정을 사로잡아야 하는 산업이다. 좋은 이야기와 연출은 팬심을 만들어내고 지갑을 기꺼이 열게 만든다. 

한국 게임계는 늦게나마 그것을 깨달았고, 2023년 마침내 결과물로 증명하고 있다. 위의 게임 중 상당수는 국내외에서 거대한 팬덤 구축에 성공한 게임들이다. 내년 또다른 스토리가, 그리고 한국 게임의 스토리가 더 넓게 퍼져나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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