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능력이 발생하는 세계 속, 사건과 비밀을 파헤치는 추리 게임
선입견 날린 시나리오 완성도.. 입체적 캐릭터와 주제의 조합

[게임플] 인디 개발의 한계는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담은 주제는 촘촘하고 진지하다.

'스테퍼 케이스'는 한국 인디 개발사인 팀 테트라포드에서 만든 추리 어드벤처 게임이다. 초능력자인 '스테퍼'들이 존재하는 가상의 런던을 배경으로, 신입 수사관 노트릭 케이스가 스테퍼 동료들과 함께 초능력에 의해 벌어지는 '마나사건'들을 수사해나가는 내용을 담았다.

플레이 전 선입견은 있었다. 수사관과 용의자 모두 초능력자들이 난립하는 만큼, 자칫 유치한 전개로 흘러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할 만했다. 하지만 플레이 후 느낌은 예상을 엇나갔다. 게임의 가장 큰 장점이 스토리 완성도였기 때문. 그리고, 오히려 여느 추리 게임보다 현실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주인공 케이스와 유쾌한 스테퍼 동료들
주인공 케이스와 유쾌한 스테퍼 동료들

추리를 소재로 한 게임은 크게 세 갈래의 내러티브 중 하나를 사용한다. 첫째는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 곧 게임의 최종 목표가 되는 단일 추리다. '오브라 딘 호의 귀환'이나 '허 스토리(Her Story)' 등 이 방면에서 평가가 좋은 게임은 꽤 많다.

둘째는 특정 주인공이 서로 무관계한 여러 사건을 에피소드마다 따로 추리하는 식. '셜록 홈즈'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게임 하나에 여러 사건을 추리하되, 그 과정을 통해 큰 줄기의 메인 스토리가 진전되는 식이다. '단간론파' 시리즈가 좋은 예시이며, 둘째와 셋째를 혼합한 '역전재판' 같은 경우도 존재한다.

스테퍼 케이스는 그중 세 번째 구조를 채택했다. 주인공 케이스가 사건을 해결하면서 수사반과 주변 인물에 얽힌 이야기가 풀리고, 더 나아가 거대한 비밀에 접근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추리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게임 전체의 시나리오 뼈대가 탄탄해야 성공할 수 있는 구조다.

유저는 동료들이 각자 능력을 통해 얻어낸 단서를 통해 사건의 진실에 접근해야 한다. 플레이는 문서를 바탕으로 한다. 진술서, 녹취록, 기억 조사서, 흔적 사진 등 무수한 자료 속에서 모순이나 증거를 찾아내 조합하면서 이야기가 흘러간다. 

개별 사건을 뜻하는 챕터 구분은 주인공 이름과 같은 '케이스(Case)'이며, 스테퍼 케이스 본편은 총 5개의 케이스로 완결된다. 케이스1이 튜토리얼을 겸하면서 평범한 감이 있지만, 이야기 밀도는 갈수록 촘촘해진다. 그 가운데 소름이 돋을 만한 반전이 나타나기도 한다.

살인 수법과 수사 기법에서 동시에 초능력이 맞붙는다
살인 수법과 수사 기법에서 동시에 초능력이 맞붙는다

추리 과정이 비교적 차분하고, 감각적인 연출이 적은 것은 아쉽다. 하지만 치밀한 텍스트 분량과 독특한 소재, 흥미로운 스토리 전개로 인해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진 않는다. 

추리의 하이라이트는 '헥사 로직'이다. 가장 깊은 진실에 다다르기 위해 여섯 개 단서를 조합하는 것. 조각이 정확하게 맞춰지는 순간, 한가운데 문서가 열리면서 마지막까지 감추고 있던 최종 키워드가 이미지로 튀어나오는 연출은 매력적이다. 저예산으로도 이런 센스를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다.

개별, 그리고 전체 스토리를 관통하는 주제도 흥미롭다. 스테퍼 케이스는 사건 해결을 넘어 인간 관계에 대한 고민, 그리고 '진실'을 둘러싼 가치관의 대립을 조명한다. 계급화가 될 수밖에 없는 마나현상 사회 속에서 양립 불가능한 가치관이 서로 부딪치고, 선악 구도를 넘어 도덕이나 사회적 관점에서 고민해볼 여지를 던진다.

또 인상적인 점은 캐릭터 메이킹이다. 게임 속 주요 인물들은 이야기를 진행할수록 입체적으로 완성되고, 케이스마다 등장하는 조연들의 개성은 뚜렷하다. 인물별 뒷이야기와 주제 고민은 꽤 무게가 있으면서도 분량이 과하지 않다. 시나리오 완성도를 놓고 평가할 때 메이저 반열에 빗대도 부족하지 않을 수준이다.

스테퍼 케이스의 꽃 '헥사 로직'
스테퍼 케이스의 꽃 '헥사 로직'

시나리오가 밀도 높게 요동치는 반면, 사건의 트릭 구조 자체는 가벼운 편이다. 치밀하고 참신한 트릭을 선호하는 추리 마니아라면 실망할 가능성도 있다. 가끔 막히더라도 힌트가 친절하다. 스토리를 중심으로 즐기고 싶은 유저를 대상으로 게임을 디자인한 흔적이 보인다.

단점의 대부분은 저인력 및 저예산인 인디 게임에게 불가피한 요소이기도 하다. 질과 양에서 빈약한 일러스트나 BGM 및 효과음,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연출 등은 분명 아쉽다. 그래도 리소스가 부족한 가운데 가장 공들여 준비한 BGM을 결정적일 때까지 아꼈다가 활용하는 정성은 보인다. 

대놓고 미운 짓만 해서 오히려 강렬한 신 스틸러였던 베링
대놓고 미운 짓만 해서 오히려 강렬한 신 스틸러였던 베링

스테퍼 케이스가 잘 만든 추리게임이냐 묻는다면, 감점 요소도 꽤 많은 게임이다. 하지만 스토리 게임으로서는 놀라울 만큼 준수하다. 한국에서 지금껏 나온 추리게임 가운데서는 가장 만족할 만한 스토리일지 모른다.

그래서 더욱 알려지고 성공하길 바라게 되는 게임이다. 이 팀에 더 충분한 예산과 개발력이 갖춰진다면, 그래서 더 풍부한 리소스를 내러티브에 활용할 수 있다면 어떤 발전이 가능해질까. 스테퍼 케이스는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9일 현재 스팀 리뷰 숫자는 400여개 정도로 많지 않지만, 마지막 챕터가 공개된 최근 평가에서 '압도적으로 긍정적'에 긍정률 99%를 달릴 만큼 호평과 응원의 목소리가 강하다. 앞으로 추가될 DLC와 사이드 스토리가 더 기대되는 이유다. 

플레이 타임은 약 15시간으로, 1만 5천원 가격에서 추리와 이야기를 즐기기에 아깝지 않은 분량이다. 텍스트 기반 추리에 목이 말랐다면, 매력적 스토리를 원한다면 부담 없이 플레이를 권한다. 작은 인디 게임에서 모처럼 지켜봐야 할 새로운 이야기꾼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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