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이 늘 두려운 사회... 게임과 코미디가 주는 의도적인 '추락의 힐링'

“당신도 언젠가 나락에 간다”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 ‘나락 퀴즈쇼’의 캐치프레이즈다. ‘나락 퀴즈쇼’는 피식대학의 김민수, 이용주, 정재형 세 사람이 유명인을 게스트로 초대해 문제를 맞추도록 하는 콘텐츠다. 하나같이 대중에게 지탄받을 만한 소지가 있는 문제인 것이 특징이며 그 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스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웃음의 백미다.

예를 들어 정치색을 밝히기 어려운 유명인에게 의도적으로 존경하는 대통령을 묻고 태극기의 정확한 모양, 친일파 색출 등 틀려선 안 될 역사 문제를 낸다. 그밖에 이미 논란이 되고 있거나 될 가능성이 높은 사회, 문화, 개인 문제에 의도적으로 노출해 답변을 강요한다. 게스트는 어떤 선택지를 내려도 소위 ‘나락’에 가게 된다.

'나락' 검색어 키워드 추이 (자료: 구글 트렌드)
'나락' 검색어 키워드 추이 (자료: 구글 트렌드)
(자료: 피식대학 유튜브 채널)

2019년 후반 전후로 등장한 ‘나락’ 밈은 인터넷 방송 문화에서 시작한 것으로 인플루언서 및 크리에이터들이 도덕적으로 지탄 받을 수 있거나 논란이 될 만한 행동을 했을 때 “나락 갔다”고 표현한 데서 기원한다. 나락의 어원 자체가 “구렁텅이(땅속)에 빠지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니 아주 정확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다.

현재 업로드된 나락퀴즈쇼의 8개 편은 총조회수 약 2,800만 회에 달한다. 이런 놀라운 인기의 저변에는 대중이 유명인의 추락(나락)을 지켜보며 흥미를 느낀다는 것에서 착안한 콘텐츠 기획에 있다.

(자료: 스팀)
(자료: 스팀)

2017년 출시된 속칭 ‘항아리 게임(정식명 ‘Getting Over It with Bennett Foddy)’은 당시 스트리밍 플랫폼 트위치를 통해 전파되어 인터넷 방송계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항아리 속에 갇힌 남성이 거대한 망치를 들고 알 수 없는 지형을 맥락없이 오르는 이 게임은 한동안 유명 스트리머들의 도전 과제였고 끝을 보기 전까지 방송을 종료하지 않는, 이른바 ‘켠왕(켠 김에 왕까지)’이 유행했다.

중간 목표와 저장 지점이 없는 이 게임은 좌절과 승리라는 오로지 두 개의 결과만 있으며 그 중간 과정에는 등반이라는 하나의 수단밖에 없다. 게임은 극악의 조작 난이도뿐만 아니라 어느 위치에서든 한 번의 실수로 처음으로 돌아가게 설계된 맵 디자인은 여러 사람을 고통에 빠트렸다.

게임 제작자 베넷 포디는 게임 출시 당시 자신의 블로그에서 “특정 유형의 사람들을 위해 이 게임을 만들었다. 그들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라고 말했다. 그의 의도는 유효했고 많은 플레이어가 그의 게임을 도전하며 상처받고 화를 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설계된 일부 요소에서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자료: 풍월량 유튜브 채널)
(자료: 풍월량 유튜브 채널)

게임이 유명세를 탄 이후 숙련된 일부 플레이어에 의해 쉽게 정복되는 장면도 나왔지만, 오랜 시간 게임은 의도와 목표를 달성했다.

게임의 악랄한 난이도와 상관없이 유일하게 이득을 누리는 자가 있었는데 바로 방송인의 플레이를 지켜보는 시청자들이다. 개발자 베넷 포디 역시 게임 내 내레이션으로 이 모습을 예상했다.

그가 노린 목표는 애초에 소수의 도전적인 플레이어가 겪을 상처였으므로 개의치 않는 듯한 말투다. ‘항아리 게임’의 초기 목표는 이미 달성한 셈이고 인터넷 방송 문화에서 의외의 흥행과 성공을 거뒀다. 오히려 바이럴이 되어 고통을 체험하고자 하는 실제 플레이어는 더 많아졌다.

‘항아리 게임’의 히트 이후 항아리 라이크 게임이 쏟아져 나왔고 방송인들의 주요 콘텐츠 중 하나가 됐다. 이미 한참을 앞서 존재했던 ‘메이플스토리’의 인내의 숲이 다시 인기를 끌었다.

아이러니하게 흥행 측면에서 게임을 못하는 방송인일수록 더 많은 인기를 끈다. 시청자들은 어리숙한 플레이어가 한 번의 실수로 공든 탑을 무너트릴 때 더 많이 “ㅋㅋㅋ”를 남발한다. 게임 방송에서 이런 플랫포머 게임 콘텐츠는 늘 같은 맥락인데도 여전히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자아낸다.

개그에서 가장 원초적이라 평가 받는 슬랩스틱 코미디를 연상케 한다. 출연자의 예견된 괴로움이 보는 이에게 기쁨으로 승화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비슷하다.

나락퀴즈쇼와 인터넷 방송의 고통스러운 플랫포머 게임 콘텐츠는 엄밀히 비교하면 서로 다른 플롯을 가지지만, 출연자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서 웃음이 나온다는 점,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을 처지에 있다는 점, 어리숙할수록 더 많은 웃음을 자아낸다는 점 그리고 모두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안전장치가 있다는 점이 닮아있다.

양자 모두 문제의 소지는 없고 콘텐츠 제공자와 소비자 결국 모두가 웃을 수 있어 윈-윈으로 마무리된다. 누구도 실제 나락에 밀어넣지 않기 때문이다.

(자료: 피식대학 유튜브 채널)
(자료: 피식대학 유튜브 채널)

‘항아리 게임’의 제작자 베넷 포디는 여러 실수로 상처투성이가 됐지만 결국 해낸 플레이어에게 사랑을 담아 게임을 헌정한다. 고통을 끝내 성취로 승화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 역시 끈기와 인내로 게임을 끝마친 방송인에게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나락퀴즈쇼는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만연해진 나락 문화에서 한 번의 실수로 무너질 수 있단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만든다. 웃음으로 긴장을 풀어 사람들의 자세를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나락을 종용하는 사회에 의도적인 추락은 오히려 원초적 해방이 되어주곤 한다. 모두가 나락에 갈 수도 있다는 말은 곧 나락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임에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플레이어일수록 더 높은 곳에 오른다. 엔딩을 본 플레이어도 결국 게임의 처음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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