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 시절 쌓인 이미지와 선입견, 끝없는 진화로 증명해낸 한 순간

[게임플] "박빙의 승부 끝에, 파이널 MVP는 쵸비입니다!"

우승 세리머니에서 이 한 마디가 나오는 순간, 수많은 팬들이 눈물을 쏟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젠지의 미드라이너 '쵸비' 정지훈은 환하게 웃으며 MVP 팔찌를 받아들였다.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20일, 젠지는 대전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23 리그 오브 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LCK) 서머 스플릿 결승에서 T1을 3:0으로 완파하며 3연속 우승의 '쓰리핏' 위업을 달성했다. '쵸비'에게 리그 우승이 더 이상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개인 커리어 첫 파이널 MVP는 그동안의 여정을 함축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쵸비는 이번 결승에서 인게임 플레이를 넘어 시리즈 판도를 홀로 쥐고 흔들었다. 시작부터 요네와 트리스타나 밴을 강제한 채 탈리야를 픽했고, 고난이도의 기동력 중심 조합을 선두에서 이끌며 협곡 전체를 휘저었다. 

2세트는 대회 버전 기준 라인전에서 숨도 쉬기 어려운 사일러스, 3세트는 미드 크샨테 카드를 꺼내 슈퍼플레이로 유리한 구도를 만들어냈다. 다른 팀이나 선수들이 시도조차 하기 어려운 픽과 플레이였다. 

쵸비는 2018년 서머 스플릿 데뷔부터 돌풍의 신예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로열로더 달성이 걸린 결승 풀 세트 접전 끝에 우승컵을 놓쳤고, 이후 파란만장한 팀 이적이 계속됐다. 2019년 그리핀 사건과 2020년 내부사정 등, 함께 성장시킨 팀 구성이 매년 스토브리그마다 흩어지는 일을 겪어야 했다. 

2020년 DRX부터 시즌 초 평가는 우승 후보가 아니었다. 기대 이상의 활약으로 결승 무대에 자주 올랐지만, 매번 더욱 강한 팀을 넘지 못하고 멈춰섰다. 준우승이 쌓여가자 '무관'이라는 칭호가 그에게 붙었다.   

역대 최상위에 꼽힐 만큼 강력한 라인전 능력을 보유했지만 그밖의 곳에서 선입견도 생겨났다. "CS만 잘 먹는다"거나 "영향력을 퍼뜨릴 줄 모른다", "결승과 다전제에 약하다" 등의 비난이 나오기도 했다. 프로는 결과로 말하지만, 자신 플레이와 상관 없이 다른 라인이 무너질 때도 이런 굴레가 씌워지는 것은 억울할 법했다.

초창기부터 갈리오, 트페 등 메이킹 챔프나 세트, 오른, 사이온 같은 탱커 픽으로도 수없이 빛나는 모습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선입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수상할 정도로 탱커를 잘 하는 미드라이너'라는 별명과 "메이킹이 약하다"는 여론은 서로 모순이었다.  

아직도 전설로 회자되는 2021년 한화생명 쵸비
아직도 전설로 회자되는 2021년 한화생명 쵸비

쵸비의 기량 평가가 극적인 변화를 맞이한 시기는 2021년 한화생명 e스포츠였다. 약한 팀 전력을 이끌고 외롭게 활약하면서 월드 챔피언십(월즈) 8강까지 팀을 올렸다. "가장 먼저 한 선수만 고를 수 있다면 쵸비"라는 관계자들의 말이 나올 만큼 몸값은 하늘을 찔렀다. 

결국 2022년 젠지에서 강력한 팀이 만들어진 뒤, 쵸비는 기량뿐 아니라 성적으로도 만개하기 시작했다. 서머 스플릿에서 프로 5년차 첫 우승을 따내자 혈이 뚫린 듯 우승을 거듭했다. 상수로 작용하는 강력한 라인전, 한계가 없는 챔프 폭, 다재다능한 전략 수행을 모두 보여주는 전력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2019년부터 4년간 모두 다른 팀으로 월즈 진출에 성공했고, 올해로 5년 연속 월즈 무대를 밟는다. LCK 올프로에 한 번도 빠지지 않은 유일한 선수이자, 한화생명 시기 정규 리그 8위에도 올프로에 선정된 유일무이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무관'이라는 말은 보통 우승할 실력을 가진 선수가 우승컵과 인연이 없을 때 쓴다. 쵸비는 이제 무관과 무관해짐을 넘어, 결승 무대를 자신의 기량으로 컨트롤하는 퍼포먼스로 증명했다. 오랫동안 이 선수를 지켜본 팬들이라면 '파이널 MVP' 칭호에 기나긴 설움이 씻겨내려가는 감정이 들지 않았을까.

가장 무서운 점은, 아직도 매년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선입견과 프레임을 순수하게 실력으로 돌파했다. 거대한 과제가 나타나면 더욱 큰 성장으로 뚫어냈다. 이번이 최고점이구나 싶으면 또다시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플레이를 보여준다. 

쵸비는 이제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아시안게임, 그리고 월즈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부숴야 할 프레임은 단 하나 남았다. 바로 국제전이다. 월즈가 유일한 과제라는 말은 곧 그것 빼고는 모든 것을 이뤄냈다는 의미다.

그간 월즈에서도 악조건은 많았다. 기이할 만큼 LCK 내전을 자주 겪었고, 2021년까지는 팀 단위에서 훨씬 강한 단두대에서 만나야 했다. 다만 지난해 월즈와 올해 MSI에서 남은 아쉬움은 분명히 있다. LCK를 지배한 데 이어 국제 무대를 지배하고 싶은 마음이 본인에게도 있을 것이다. 

LPL이 매우 강하다고 점쳐지는 월즈다. 그에게 있어서도 국제전 결승은 미지의 무대다. 하지만, 안 된다는 말을 듣던 수많은 것들을 결국 이뤄낸 선수다. '쵸비' 정지훈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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