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년 9월 25일, 화이트데이 패키지 게임이 처음 선보였을 때 유저들은 열광했다. 마침 여고괴담과 같은 학원 호러물이 인기를 끌던 시기라 기대는 커질 대로 커져 있던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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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비운의 화이트데이 패키지 판

한국적 정서에 기반을 둔 ‘호러’는 대중적 재미에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 선생의 연주곡 ‘미궁’이란 작품을 메인테마로 사용해 완성도를 높였다. '미궁' 은 게임속 스토리 및 분위기와 완벽에 가까운 조화를 이뤄내 유저의 긴장감을 높이게 만든 핵심 콘텐츠다. 한국 게임 제작에 이 같은 명인의 작품이 참여됐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게임에 품격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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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 제 3 작품집인 '미궁'은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묘사한 창작곡이다. 우측은 '화이트데이'가 표현한 미로이며 미궁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은 다양한 장르의 외산 패키지 게임과 온라인 게임들이 넘쳐 들어오던 시기였다. 1998년 한국도 초고속인터넷의 대중화가 시작됐고, 스타크래프트가 들어온 시기이기도 하다. PC통신 시절 머드게임에서 돈 냄새를 맡은 국내 업체들은 패키지 시장에서 온라인 시장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로 인해 국산 패키지 게임 시장은 크게 위축됐다. 당연히 장르도 RPG 중심에서 멈춰버렸다. 그래서 당시의 화이트데이는 한국게임의 산업적 측면으로도 대단한 의미가 있었고, 유저들의 기대도 컸다.

무엇보다 유저들이 '호러'라는 새로운 장르를 고려할 수 있는 선택권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만큼 다양성에서 한걸음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다수의 유저들 스스로가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화이트데이 초기 판매량은 3천 여장, 이에 반해 불법다운로드 수는 15만 건을 넘어섰고 이듬해 패키지게임 수명의 종착역으로 불리는 게임 잡지의 부록(번들게임)으로 등장하고 상품가치로서의 수명을 마쳤다. 개발사 '손노리'는 불법다운로드를 막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지만 모두 헛수고로 끝났다. 불법다운로드를 근절하기 위한 노력도 비난의 화살만 맞고 흐지부지 끝났다. 당시 다운로더 중 미성년자가 있었는데 ‘손노리’가 인정도 없이 미성년자도 고소했다는 것이 비난의 이유였다. 그리고 한국 패키지 게임 산업은 몰락했다.  

당시는 용산전자상가에서 조립 컴퓨터를 맞추면 OS부터 게임, MP3, 심지어 애니메이션, 영화까지 모든 소프트웨어를 하드디스크에 서비스로 받았다. 패키지 게임은 물론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세가의 세턴과 같은 콘솔 타이틀도 불법복제에 난도질 당했고 그 결과 이스 시리즈로 유명한 팰콘등 몇몇 일본 업체는 아예 한국시장에서 철수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런 시기였다. 불법다운로드의 행위에 대해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죄책감이란 없었다. 회사, 학교 내 컴퓨터실 조차 불법소프트웨어가 깔렸던 시기다. 그러한 행위가 경제 전반에 미칠 심각성에 대한 교육도 없었고, 행여 인지하고 있었다 해도 가볍게 넘길 만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 사회 전반 분위기에서 타격받은 국산게임 1호가 화이트데이다. 잘 만들어졌고 인기도 많았는데, 그 인기 때문에 순식간에 사라진 비운의 게임이다. 시대를 잘못 만났던 것이다. 제작 기간만 3년 걸린 피와 땀의 결과가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14년이 지난 현재 화이트데이를 만든 손노리는 로이게임즈로 회사명을 바꾸고 ‘화이트데이 모바일’로 다시 컴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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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모바일로 다시 등장한 '화이트데이'

필자는 화이트데이가 모바일 버전으로 나온다는 첫 소식을 듣고, 다시금 PC 버전의 ‘화이트데이’를 직접 플레이해봤다.(물론 정품 CD를 어렵게 빌렸다) 그리고 14년이라는 시간의 세례를 받은 게임이지만 촌스럽다거나 최근 출시된 게임에 비해 뒤처진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모바일 버전 역시 그래서 스토리, 음악 등에서 원작을 많이 살렸다는 말도 수긍이 갔다.

좋은 책과 좋은 영화는 10년 20년 후에 감상해도 감동이듯, 게임 역시 마찬가지다. 영혼 없이 찍어낸 양산형 게임은 2~3년만 지나도 우리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우리는 매일 방대한 콘텐츠를 만나며 살고 있다. 그래서 쉽게 버리고 쉽게 찾는다. ‘제대로 만든 작품’이 아닌 이상 오랜 시간을 기억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그러한 기준으로 봤을 때 ‘화이트데이’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화이트데이가 2001년 당시 시대를 잘못 만났다면 지금은 정당하게 평가받고 구글 유료 인기순위 1위도 달성했다. 시대가 변했어도 한번 잘 만들어진 게임이었기 때문에 유저에게 잊히지 않고 또다시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훈훈하고 모범적인 사례를 만들어냈다. 그것도 현재 트랜드와 상반된  '한국형 호러'로 14년 전 패키지 분야에서와 똑같이, 한국 모바일게임 시장에서 새 장르를 개척했다.

시간이 지난 만큼 유저들도 성숙단계에 접어들었다. 물론 아직도 다양한 분야에서 불법다운로드가 종종 발생한다. 하지만 유저들은 최소 과거처럼 그것을 자랑처럼 늘어놓거나 떠벌리지 않게 됐다. 유저들도 불법 다운로더에게 일침을 가하는 등 자성의 목소리도 어느 때보다 높다. 

8800원이라는 가격에서 만든 사람들의 노력과 얼마만큼의 가치가 담겨 있는지 판단할 줄 아는 시각도 가지게 된 것이다. 더 가치가 있는 것 에는 그보다 더 높은 금액도 기꺼이 지불할 줄 알게 돼 한정판 역시 완판됐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 때문에 한국 게임 콘텐츠 산업도 긍정적인 미래를 그려볼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물론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게임'에 한정된 말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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