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게임 소설이 크게 유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게임 소설은 대부분 MMORPG의 묘사법을 그대로 차용한다. 레벨이 18로 상승하였습니다! 라거나, 325의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같은 문구 말이다. 수치화는 이럴 때 빛을 발한다. 짧은 문장으로 현 상황에 대한 즉각적인 상황 인식과 상태 파악을 돕는다. 이런 방식의 묘사를 통해 현실감 및 몰입도를 높인다.

우리가 플레이하는 게임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내 캐릭터의 현재 상태를 HP와 MP, 근력, 지능, 민첩성 등의 능력치를 통해 파악할 수 있고, 레벨업을 하고 좋은 아이템을 장착할수록 능력치는 상승하듯이 말이다. 인생에서는 내가 레벨업을 했는지 어쨌는지 도통 알 수 없지만 게임은 손쉽게 이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의 수치화는 게임이 글자로만 이루어졌던 시절부터 당연하게 여겨져 왔던 것이다. 게임의 문법이 발전하고 점차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수치화는 자연스레 실존인물들에 대해서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게임 회사 KOEI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삼국지 시리즈를 보자. 이 게임의 능력치는 통솔력, 무력, 지력, 매력, 정치력 등 대략 다섯 가지로 분류된다. 시리즈에 따라 저 중 한두 가지 요소가 없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능력치 시스템은 삼국지 시리즈 전반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 해도 무방하다.

게임 속 등장인물들은 부여받은 능력치에 따라 각 업무에서 보이는 능률이 달라진다. 전통적으로 무력 1위를 달리는 여포, 지력 1위를 달리는 제갈량 같은 경우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활약을 보여준다. 삼국지 5의 경우 여포를 홍농관 같은 곳에 언월진으로 배치해두면 적 부대 열도 혼자 막을 수 있다. 지력이 낮아 혼란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즉 여포에게 맹덕신서 같은 혼란 방지 아이템을 쥐어주면 그야말로 무적이 된다.

제갈량은 초기작인 삼국지 2, 3에서 유일하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군사’였다. 이를 이용하면 상대 장수를 무조건적으로 등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계략으로 상대 진영 장수의 충성도를 조금만 떨어뜨린 뒤, 그 장수에 대한 인사-등용 커맨드를 실행하면 군사가 이 일이 이루어질지 아닐지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는데, 제갈량이 군사일 때 그가 성공할 것이라 말한다면 그 일은 백 퍼센트 이루어졌다. 심지어 충성도가 100인 장수에 대해서도 무한히 등용 커맨드를 누르다 보면 성공하리라는 조언이 뜰 때가 있었다. 이러한 플레이를 통해 상대 진영의 도시를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점령하는 것이 가능했다. 초기작에서는 태수를 등용하면 땅까지 고스란히 따라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4편에서는 화계와 천변을 통해 맵 전체에 불을 지르고, 11에서는 ‘신산’이란 능력을 통해 자신보다 지력이 낮은 부대에 100% 계략 성공 및 100% 크리티컬, 그리고 자신보다 지력이 낮은 부대가 행하는 계략에는 절대 걸리지 않는 것이 바로 제갈량이다. 그리고 제갈량의 지력은 100이라, 자신보다 지력이 높은 이가 없다. 이외에도 대다수 시리즈에서 능력치 총합 1위를 달리는 조조, 언제나 매력은 최선두인 유비, 무력은 높고 지력은 낮은 장비 등등, 삼국지 시리즈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화에 성공하며 게임에 긴 생명력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가상인물이 아닌, 실존인물의 개성과 능력을 고작 다섯 개 분야의 능력치로 결정할 수 있을까? 대답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수치화 방식은 실존인물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단편화되는 경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특정인물에 대한 편애가 드러나기도 한다. 일본 내에서 인기가 높은 조조의 경우는 전술했듯이 늘 능력치 총합이 1위 아니면 2위를 차지한다. 게임 내 이벤트에서도 조조가 벌였던 대표적 악행인 서주대학살(「정사 삼국지」에서 조조에 대한 평가는 매우 호의적이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살육이란 말을 가감 없이 쓰고 있다.)은 한 번도 묘사된 바가 없다. 조조가 잘 활용했던 부하장수들 대다수는 준수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으나, 조조가 별 것도 아닌 이유로 죽인 누규라는 인물은 매력이 최하수준으로 설정되어 있다. 마치 누규가 죽어 마땅한 인물인 것처럼 말이다.

조조와는 반대로 원소 진영은 정말로 취급이 좋지 않다. 그나마 안량과 문추가 무력 90을 넘기지만, 그 외의 능력치는 전반적으로 떨어진다. 전풍과 저수는 그나마 지력 90을 넘기는 경우가 있지만, 그 외의 모사진들은 잘 쳐줘야 80대의 능력치다. 봉기의 경우는 기주의 내정과 실무를 담당한 인물임에도 낮은 정치력을 보인다. 심지어 전풍과 저수 같은 준수한 모사들 마저도 삼국지 11에서는 아예 특기를 부여받지 못했다. 원소를 비롯하여 그의 아들들인 원담과 원상 역시 능력치가 낮기는 마찬가지다. 일부 삼국지 시리즈의 팬들은 삼국지 게임 내의 능력치로만 장수를 평가하여 A보다 B가 게임 능력치가 더 좋으니 실제로 A가 B보다 더 훌륭한 장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풋볼 매니저와 같은 프로스포츠 매니징 게임들은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에 실존하는 인물들을 직접 다루고 있다. 국가대표는 물론이고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리그의 선수 데이터가 들어가 있다. 이 선수들의 정보 및 능력치는 실제 축구 종사자들과 스카우터들의 평가에 따라 매겨져 있다. 때문에 이 능력치로 축구 선수를 판단해도 어느 정도는 아귀가 들어맞는다. 멘탈 같은 능력치는 눈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기에 가타부타 말하기 어렵긴 하지만 말이다.

이미 역사 속의 인물이 된 사람을 평가하는 것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평가할 때의 자세에는 사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접근성이나 조사의 용이함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코트디부아르의 축구선수인 디디에 드록바가 위닝 일레븐 시리즈에서 본인의 능력치가 낮게 나오자 코나미에 항의전화를 걸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연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전 세계 스카우터들의 평가자료를 모아 게임 내에 적용한 FM 시리즈는 그 조심스러움과 까다로움을 훌륭하게 승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소수 개발자가 역사소설을 바탕으로 능력치를 정한 삼국지 시리즈와는 달리 말이다.

삼국지의 이야기가 펼쳐지던 시대, 전예라는 모사가 있었다. 그는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어느 능력치 하나 90을 넘기지 못했고, 가장 높은 지력도 잘 해봐야 80 초반이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서의 전예는 여느 이름난 모사에 못지않은 식견과 지략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234년 제갈량이 마지막 북벌을 시도하자, 촉한과 동맹관계인 오나라 역시 손권의 주도 하에 10만 대군을 일으켰다. 오나라 군대가 신성을 공격하자 만총은 이를 구원하러 가려 했다. 전예가 말했다.

“적이 대군을 몰고 오는 것은 작은 이익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신성을 담보로 우리의 대군을 끌어들이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공성하도록 내버려두어 지치게 만들어야지 적극적으로 싸워선 안됩니다. 신성이 함락되지 않으니 적은 반드시 피로해지고 나태해질 것이니 그 이후에 적을 공격하면 크게 이길 수 있습니다.”

여느 모사라면 이만큼의 식견을 드러내는 데에서 멈췄을 것이다. 전예는 한 마디를 더 한다.
“그리고 이 계책을 손권에게 알리면 그는 알아서 군을 돌릴 것입니다.”

과연 손권은 군사를 물렸다. 이처럼 전예는 쓸데없는 전쟁을 피할 줄 알았으며,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방법을 알았다. 그러나 싸우지 않고도 이겼기에 군담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 그의 활약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고, 이런 일화는 역사서인 「정사 삼국지」에만 담겨져 있다. 게임 속 능력치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던 셈이다.

우리 자신의 능력치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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