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 여성에 대한 갈망은 신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마존의 경우가 그렇다. 복수형은 아마조네스. 헤로도토스는 이들을 '남자를 죽이는 자'란 의미의 안드로크토네스라 칭했다. 아이를 갖기 위해 남자를 납치하여 관계를 맺은 후 죽였으며, 낳은 아이도 남자라면 죽였거나 평생 노예로 부렸다. 남자로만 이루어진 부족 가르가리안과 일 년에 한 번 결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마존의 전투

이와 유사한 여전사 전설은 인도, 아라비아, 영국, 브라질 등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인류 역사에서 사냥이나 전쟁 따위의 무력행위는 남성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전설 혹은 신화가 다수 만들어졌다는 것은 일종의 대상화 작업에서 비롯한 일이었다. 강인함에 대한 순수한 숭배와 아름다운 여성의 결합. 그리스 신화 속 전쟁의 신이 여성인 아테나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전쟁의 여신 아테나

현대의 게임에서 나타나는 여전사들의 모습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기준은 현실성이다. 이를테면 커다란 대검 등의 중장비로 무장한 작은 체구의 미소녀 타입 캐릭터가 있다. 'Fate/Stay Night'의 세이버 같은 캐릭터가 그렇다. 

체구는 조그맣고 가녀린 팔다리를 가지고 있지만, 강력한 마력을 토대로 갑주를 착용하고 성검을 휘두른다. 이런 종류의 캐릭터들은 강한 전투력을 가졌음에도 그 외모와 성격에는 주 소비계층인 남성들의 대중적인 여성성의 이상이 반영되어 있다. 적 앞에서는 냉정하고 강인하지만 주인공 캐릭터 앞에서는 청순가련한 소녀로 되돌아가는 장치적인 설정이다.

'Fate/Stay Night'의 세이버

그렇다고 전투에서 완벽한 자립이 가능한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결국은 남자 주인공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Fate/Stay Night'의 예를 들면, 주인공 에미야 시로가 투영해낸 검을 통해 세이버가 눈앞의 난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있다. 이 승리는 남자 주인공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승리다. 힘을 가진 여성이란 설정이 무색하게 남성의존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성이 결여된 미소녀 캐릭터들은 성적인 대상 혹은 연애대상으로서 소비되어 왔다. 

과거 신화 속 여전사의 모습에서 좀 더 말초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 방향으로 볼 수 있으며, 나아가 강력한 힘을 가진 여성을 자신의 아래에 두는 지배적 욕구의 실현을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Fate/Stay Night'의 장르가 미연시 혹은 비주얼 노벨이고, 장르적 틀에서 벗어날 생각은 애초에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일본식 RPG에서 이와 유사한 캐릭터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세이버가 에미야 시로와 함께 칼리번을 이용해 버서커를 물리친다

현실성이 반영된 여전사들은 이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가녀린 체형이 아니라 싸우는 전사답게 근육질이며, 꼭 근육질이 아니더라도 골격과 체격은 탄탄하며 성격 또한 강인하고 난관을 헤쳐 나가는 캐릭터로 만들어져 있다. 현대적인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예로 말미암아 짐작하겠지만, 강력한 전투능력을 가진 캐릭터라 하여 무조건 페미니즘적 요소를 갖췄다 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능동적이고 자주적인 성격과 행동력을 갖추었고, 이러한 모습이 게임 속에서 얼마나 잘 묘사되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게임과 영화 속 라라 크로프트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캐릭터로 첫손에 꼽을 인물은 '툼 레이더 시리즈'의 라라 크로프트이다. 리부트되기 이전의 과거 시리즈는 핫팬츠에 민소매 셔츠를 입고 섹스어필하는 캐릭터로서의 외양을 갖추고 있긴 했지만, 설정에서부터 자주성을 강조하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라라는 약혼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스키 여행을 갔다가 조난당한 뒤 자력으로 생존했고, 이 과정에서 모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온갖 유적에서 유물을 빼돌리는 무덤 도굴꾼(툼 레이더)이 된 것이다. 덕분에 30대가 넘도록 독신이다. 모험을 좋아한 탓에 부자였던 부모님으로부터 유산 상속을 거부당하는 등 사실상 의절 상태이며, 자신의 모험기를 담은 책을 펴내어 이 돈으로 여행을 다녔다. 

구 시리즈의 7편인 '툼 레이더 레전드'에서는 과거사가 일부 변경되어 유적의 힘에 휘말려 사라진 어머니를 찾기 위해 도굴꾼이 되었다는 설정이지만, 도굴꾼이 되며 약혼을 파기하고 전 세계를 떠돌며 자신의 모험을 해나가는 라라의 모습은 그대로이다.

'툼 레이더' 리부터에서는 많은 것들이 바뀐다

신 시리즈로 넘어온 지금에 이르러서 라라는 섹스어필하는 복장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고, 자주성 및 주체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는 모습이다. 대학교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졸업한 라라는 학생 시절 학비 마련을 위해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했다. 부자 집안의 딸이었던 설정도 사라진 셈이다. 

전투기술은 거의 익히지 않았으나 각종 체조 및 운동을 전문가 수준으로 익혔으며, 양궁과 암벽등반, 독서와 연구가 취미다. 응급처치법에 대해서도 박식하다. 그러나 모험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까웠는데, 신 시리즈의 첫 작품은 이러한 라라가 어떻게 한 명의 여전사로 태어나는지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다. 

라라는 동료들과 같이 탐험을 떠났으나 조난당하여 혼자 떨어지게 된다. 맹수는 물론이거니와 유물을 노리는 무장한 악당들이 돌아다니는 섬에서 한 명의 여성이 살아남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기존의 라라가 진한 성적 매력을 바탕으로 당당함과 강인함으로 남성들을 짓밟는 모습이었다면, 리부트 후의 라라는 동료가 위험에 처하면 매우 불안해하고, 급박한 상황에서는 진한 공포를 느끼며, 추위에 몸을 떨며 모닥불을 피우는 등 그녀가 겪는 고통과 고뇌가 상당히 현실적으로 드러난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동료들이 악당들에게 살해당하거나 납치당하게 되자, 동료를 구하고 또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무기들을 구하고 직접 개조하여 적을 물리쳐 나간다. 이 과정이 조금 급박하고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엄연히 액션게임인 이상 주인공이 겪는 고뇌를 필요 이상으로 보여주기도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라이즈 오브 더 툼 레이더'에서는 아예 방한복을 입고 나온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툼 레이더' 시리즈의 리부트에서는 섹스어필하는 복장이 거의 사라졌다. 이 선택은 리부트의 후속작인 '라이즈 오브 더 툼 레이더'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만의 주체성을 선보이며 전사로 거듭나는 라라의 내면적 매력을 강하게 어필하기 위해 섹스어필을 제거한 것으로 보이며, 이 선택은 성공적이었다. 리부트 첫 작품은 850만장 이상의 판매량을 보이며 역대 '툼 레이더' 시리즈 중 가장 흥행했고, 후속작 역시 준수한 성적을 올렸다. 

결국 게이머를, 사람을 사로잡는 캐릭터의 매력이란 단순히 성적 매력을 드러내는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가득한 '오버워치'. 힐러형 저격수 '아나'의 모습

최근 한 신작 게임이 출시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서비스 종료를 선언했다. 대작으로 기대 받던 작품의 초라한 말로였다. 게임성에 대한 비판은 둘째 치고,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건 여성 캐릭터였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고민 없이 만들어진 안이한 설정이었다. '전장의 아이돌'이란 별명은 누구도 납득하기 힘들다. 전장은 죽고 죽이는 곳이다. 서로의 목숨과 내일을 걸고 싸우는 곳이다. 더군다나 현실에 기반을 둔 FPS 장르에서 미소녀 캐릭터의 필요성을 납득하기란 더더욱 힘들었다. 

블리자드가 왜 '오버워치'에서 메이, 자리야, 아나 등 외양과 연령을 비롯한 기초적인 설정부터 기존의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난 여성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투입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캐릭터와 게임의 장르적 맥락에 맞지 않는 무분별한 성상품화는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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