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개발 환경 특성에서 너무나 쉬운 악용 가능성
휴식해도 후유증 사라지지 않는 '크런치 모드', 인재 이탈 가속화 우려
'게임사=등대' 취급되던 시절... 과로사 뉴스 재현 두려워

[게임플] 겨우 조금씩 개선해온 게임계 업무 환경이 역행 위기를 맞이했다.

정부가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주 52시간 근무제 유연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12월 논의기구를 통해 권고안이 공개됐고, 이달 근로시간 개편을 포함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골자는 현행 주 단위로 진행되는 연장근로시간 관리를 년 단위까지 확대하는 것. 1주 최대 근무시간은 69시간으로 늘리는 대신, 연장근로기간에 비례해 1년간 평균 근무시간은 52시간 이하로 맞춘다는 계획이다.

12월 이후 한 달 동안 게임계 관련 인력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각자 우려하는 지점은 조금씩 달랐으나, 주52시간 유연화가 근무 환경에 악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결론이 대개 일치했다. 어느 정도 유연화가 필요하다는 소수 의견도 기반 정책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전제를 깔고 있다.

국내 게임계 종사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화이트칼라 산업 중 근무 유연화의 영향을 특히 많는 업계이기 때문이다. 반대급부로 주 52시간 시행 이후 워라밸 환경이 가장 크게 달라진 수혜 업종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 근무 시간 유연화, 게임은 '악용하기 가장 편한 업계'

게임 개발의 특성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다. 업무량이 몰아치고 집단적으로 야근에 시달리는 특정 기간이 있다. 흔히 말하는 크런치 모드다. 

과거 '판교의 등대', '구로의 등대' 같은 별칭은 모두 게임사를 지목해 등장했다. 밤 시간을 넘어 새벽까지도 사옥 불이 꺼지지 않아 주변 길을 밝게 비쳤기 때문이다. 업계인들은 주 52시간 시행 이후 크든 작든 근무 시간 완화를 겪었다고 일제히 답했다. 

이는 설문조사에서도 나타났다. 2021년 기준 게임계 종사자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41.3시간으로 2년 만에 5시간 가량 줄었다. 특히 크런치 모드 경험자 비율은 60.6%에서 15.4%로 극적인 감소를 보였다.

겨우 개선된 환경이 다시 '등대' 시절로 악화되지 않을까. 이것이 우려가 쏟아지는 핵심 이유다. 잊을 만하면 게임사 직원의 과로사가 한 번씩 뉴스에 등장하던 시기다. 해외의 업무 환경과 비교해도 추세 역행에 해당한다.

해외 게임사 재직 경험이 있는 개발자는 "서양 쪽 게임사는 한국보다 평균 근무 시간이 적으면서도, 크런치 모드에 대한 문제 제기와 경각심이 날로 늘어가는 추세"라며 "오히려 집중 근무 시간을 더 늘린다는 것은 글로벌 스탠다드와 멀어지지 않나"고 반문했다.

정무부처는 벤처기업 경영진과의 간담회를 통해서도 근무시간 연장 완화를 피력했다
정무부처는 벤처기업 경영진과의 간담회를 통해서도 근무시간 연장 완화를 피력했다

업무가 많을 때 열심히 일한 뒤 그만큼 쉴 수 있다고 하지만, 게임계 환경에서 휴식을 확실하게 보장하기 어려운 난점이 존재한다. 

많은 게임사는 내부에서 라이브 파트와 신작 파트가 나뉜다. 대형 게임사는 게임이 출시되면 신작 프로젝트 팀이 종료되고, 라이브 파트에 남아 게임을 계속 담당하거나 휴식 후 다른 신작 프로젝트로 옮기는 등 갈림길이 생긴다. 하지만 중소 업체는 현실적으로 신작과 라이브를 구분짓기 힘들다는 답변이 자주 나온다.

출시 후 자연스럽게 라이브 운영을 맡게 될 경우, 본인이 맡은 코딩 및 모델링과 리소스 관리 등의 이유로 업무 역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오랜 경력의 한 개발자는 "게임 출시만 끝나면 다같이 푹 쉬자는 말을 몇 번 들었지만, 실제로 제대로 쉰 적은 없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부 및 경제지는 미국에서 실시하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일본의 연장근로 제도를 예로 들며 해외에서도 비슷한 제도가 실시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 사례 모두 전문직 고연봉자를 대상으로 하며 집단 동의가 기본 전제다. 정부 권고안은 이와 달리 업계인 대다수가 포함된다. 사용자의 조정 권한도 특별한 제약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돌발 업무가 잦은 게임계에서 1년 단위로 근무 시간을 관리하려면 기준이 매우 모호할 것이라는 답변도 나왔다. "크런치 모드로 주 69시간을 일하고,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데이터에 입력된 시간만 52시간으로 맞춰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

■ "정부가 설명한 탄력적 근무,  경영진 '체리피킹' 될 것"

"백 번 양보해서 52시간이 유연화된다면, 포괄임금제 금지는 필수로 따라와야 한다"는 의견도 다수 흘러나온다. 아직도 업계인 다수를 옭매는 주범으로 업무 추가수당 없이 처리되는 포괄임금제가 꼽히는 것이다.

넥슨, 엔씨소프트, 넷마블 등 '3N'을 비롯한 대형 게임사들은 수년 전 포괄임금제를 폐지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2022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포괄임금제로 급여를 받는다는 업계인들의 응답 비율은 아직도 79%에 달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게임사 대부분이 포괄임금제를 사용하지 않는데 왜 현실은 큰 변화가 없을까. 답은 이미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된 업체별 양극화에서 나온다. 

2018년 한국콘텐츠진흥원 보고서에 따르면, 게임산업 전체 종사자 중 상장사에 속한 비중은 14%에 불과했다. 대형 비상장사인 스마일게이트 같은 특수 사례를 고려해도, 80% 가량의 업계인은 상장하지 못한 중소 규모 게임사에 재직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전체 산업에서 상장사들의 매출 비중은 약 50%, 수출액은 70%를 넘어섰다. 이미 실적과 업무 환경에서 차이가 크게 벌어진 추세에, 근무 유연화가 더해질 경우 대형과 중소 업체들의 업무 환경 양극화가 더욱 극심해질 가능성은 높다.

한 중견 기업 개발자는 "업무 시간을 체크하는 시스템은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며 "작은 규모 게임사는 장기 휴가를 써도 현실적으로 업무가 전부 얽혀 있고 대체 인력도 없어, 집에서까지 비공식으로 일에 참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근무 연장에 대한 대가는 주지 않으면서 업무 연장은 지극히 편해진다. 이를 찬성하는 사측을 "의무와 부담은 빼놓고 과실만 골라 따먹으려 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체리피커(cherry picker)'로 비판하는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대기업 게임사라고 해서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다. IT 업계 전체를 상대로 인재 경쟁 및 유출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 그로 인해 2021년경 연봉 대폭 인상과 파격적인 복지 개선을 내세웠으나, 여전히 검증된 인력 영입은 난항이다.

넥슨 계열사의 한 개발자는 "지금도 불확실한 업무 성과나 이슈에 따른 돌발 출근으로 고급 인력 사이에서는 게임사 인기가 높지 않다"면서 "유연화가 실시되면 가장 크게 환경이 악화될 게임계를 찾아올 인재는 더욱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 "인간의 건강은 게임 HP가 아니다"

"크런치가 끝나고 푹 쉰다고 해서 크런치 이전과 동일한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석 달 동안 하루 14시간을 일에 매달려야 했던 적이 있다. 그 후유증은 1년 뒤에도 남아 있었다. 한 달 휴가를 썼는데도 그랬다. 한번 뒤집어진 속과 이명 증세는 조금 쉰다고 나아지는 게 아니더라."

실제 크런치 모드를 체험한 업계인들에게서 비슷하게 나오는 대답이었다. IT, 그중에서도 게임계는 건강 악화와 과로가 유독 화제였다. 특정 기간 개발이 집중될 때 인력을 거리낌 없이 소모했고, 3개월 과로는 3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는 후유증으로 남곤 했다. 과로 경험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젓는 이유다.

실제로 병리적 근거와 규정이 존재했다. 고용노동부 고시에 따르면 증상 1주 내에 업무 양이나 시간이 이전 12주간의 1주 평균보다 30% 이상 증가하면 '단기 과로'로 인정한다. 초과 업무를 얼마나 긴 기간 했느냐를 떠나, 잠시라도 급격히 업무를 과중하게 매기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주 52시간만 일해도 충분히 과중한 크런치 모드"라고 업계인들은 말한다. 휴게시간을 제외하면 보통 5일 내내 9시에 출근하고 9시에 퇴근해야 그 정도 시간이 나온다. 최대 근무시간 69시간은 동일한 휴식으로 회복하기 힘든 경험이었다는 것이다.

게임은 철저하게 사람으로 인해 만들고 관리하는 산업이다. 그리고 사람은 게임 속 캐릭터처럼 휴식한다고 해서 체력 소모량에 균일하게 회복되지 않는다. 게임 운영에서 급한 업무가 생길 때도 많다. 하지만 그때 소모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관리를 할 때 결국 장기적인 게임계 비전도 만들 수 있다.

판교에 다시 '등대'가 켜질까. 새벽 시간 특정 게임사 앞에 택시가 줄지어 늘어서는 풍경을 다시 보게 될까 두려움이 커진다. 지난달, 한 홍보팀 관계자가 반 농담 삼아 아래와 같이 건넨 말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게임 이해도가 전혀 없는 이들이, 누구보다도 사람 다루기를 게임처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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