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에 몰입하면서 우리는 '무언가'를 얻는다

[게임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공부하게 만드는 게임이 있었다. 

1990년대 어린 시절, 좁은 견문으로 즐겨온 '게임'은 몇 가지 형태로 정해져 있었다. 실시간 조작으로 스테이지를 깨거나, 몬스터를 잡아서 레벨을 올리거나, 병력을 이끌고 상대를 전멸시키면 이기는 것이 게임이었다. 일단 누군가를 잡아야 했다.

그래서 '아재' 게이머들은 '대항해시대2'를 처음 만난 순간을 기억한다. 1993년이 출시지만, 정보가 느린 시대라 자신만의 첫 플레이 시기는 모두 다를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비슷할 것이다. 그동안 만난 적이 없는 세계였다.

교역, 탐험, 해적 등 원하는 방향대로 대항해시대 배경에서 살아간다. 상대는 몬스터가 아니라 역사와 세계 그 자체였다. 해적을 만나 목숨을 걸고 도망치기도 하고, 대서양 한복판에서 폭풍우에 휘말려 난파되기도 했다.  

점차 부를 쌓고 함대를 강하게 해서 역사의 일원이 된다. 그렇게 사회문화적으로 자신을 성장시키는 플레이는 충격적이었다. 메인스토리를 모두 클리어하거나 공작 작위를 받으면 엔딩이지만, 그 세계를 떠나기 싫어서 엔딩을 거부하고 플레이를 계속하는 유저들도 많았다.

게임하면서 천 번 이상은 읽었을 대사
게임하면서 천 번 이상은 읽었을 대사

어려움도 많았다. 옛날 게임이 그렇듯, 지금 기준에서 굉장히 불친절한 시스템은 어쩔 수 없었다. 

보르도 항으로 편지를 전해 달라고 의뢰가 오는데, 당시 초등학생이 보르도가 어느 나라에 붙어 있는지 알 턱이 있을까. 그밖에 스칸디나비아 반도, 마젤란 해협 등 어린 나이에 처음 들어보고 게임에 표시도 없는 곳을 탐험하자는 임무가 잇따랐다.

지금처럼 인터넷 지도를 쓸 수 없는 환경이었다. 인터넷커녕, 조금 부유한 아이가 모뎀 달고 PC통신 하이텔 아이디 생겼다고 막 자랑하던 시절이다. 아날로그 세계에서 답은 하나뿐이었다. 종이 지도를 펼치는 것이다.

학교에서 받은 사회과 부도를 옆에 펼쳐놓고 대조해가면서 새 지형을 탐험했다. 웃음이 나올 말이지만, 당시에는 합법적 '맵핵'을 손에 넣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처음 듣는 이름의 항구로 가야 할 일이 생기면 대륙별 페이지를 넘겨가며 모든 글자를 찾았다. 그 이름이 나올 때까지.

이름 찾기에 가장 고생한 신기록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맛사와' 항이 대체 어디인지 찾아내기까지 약 3일 정도가 걸렸다. 즉 3일 정도 퀘스트 진행 없이 무한 탐험과 교역만 한 것이다. 그렇게 해도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게임이었다.

무역과 시세의 개념을 여기서 처음 배웠다
무역과 시세의 개념을 여기서 처음 배웠다

그렇게 차기작 '대항해시대3'까지 매달리기를 몇 년, 어느새 세계지리 대부분이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다. 세계의 주요 항구와 탐험에 필요한 지형까지. 그 이후 사탐 과목으로 선택한 세계지리에서 1등급을 놓치는 일은 없었다.

단순히 위치만 익히는 것이 아니었다. 교역을 위해서는 지역별로 특산물은 무엇인지, 지배 세력은 어느 곳이었는지를 속속들이 파악하게 됐다. 리스본의 돌소금, 소팔라의 상아, 리우데자네이루의 금 등... 특히 이스탄불의 융단과 아테네의 미술품을 오가는 황금무역 루트는 평생 잊지 않을 것 같다.

게임에 빠져 있다 보니 세계지리는 물론, 세계사와 지역별 문화 환경까지 관심을 가지게 됐다. 역사 시뮬레이션 장르의 무서움이었다. 

이 로고만 보여도 설레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 로고만 보여도 설레던 시절이 있었는데

대항해시대2는 지금 다시 플레이하면 UI 등 편의성에서 굉장히 불편한 게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성 본연에서 우러나오는 재미는 아직도 확실하다. 이 재미를 그대로 간직한 채 그래픽과 편의성이 보완되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대항해시대 마니아들이 한 번쯤 떠올린 생각이다.

출시를 앞둔 '대항해시대 오리진'에 기대하는 부분도 비슷할 것이다. 대항해시대2와 대항해시대 외전을 원작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코에이테크모 역시 게임 개발에 참여했다. 대항해시대 30주년을 기념으로 개발에 들어간 만큼 오랜 기간의 정수가 녹아 있길 바랄 뿐이다.

게임은 대리체험이 가능한 문화 콘텐츠다. 잘 만든 게임은 무언가를 얻게 한다. 그것이 반드시 공부나 지식이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싱글 플레이의 기승전결 재미, 멀티플레이에서 겪는 협력과 경쟁에서도 우리 모두는 평소에 얻지 못하는 것들을 얻는다. 끊임없이 미지를 '경험'하는 것, 그것은 곧 게이머의 추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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