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남짓, 우리나라에 MSX가 보급됐을 무렵 물을 건너온 ‘핑크삭스’라는 작품이었다.

비슷한 시기 발매되었던 컴파일의 디스크 스테이션과 유사한 컨셉의 디스크 매거진(용량이 작은 게임들을 여럿 집어넣은 것)이었는데, 미니게임들을 클리어할 때마다 여자 캐릭터의 속옷 차림 등 수위 높은 그림을 볼 수 있었다.

퍼즐의 난이도가 쉬운 편은 아니었기에 하루 종일 매달려 그림 한두장 보는 게 다였음에도 이 게임의 인기는 결코 낮지 않았다. 물론 일본 본토에서도 그랬다. 1986년 발매된 ‘몽환전사 바리스’ 에서는 세일러복 아머를 입은 여전사가 액션 게임의 주인공으로 등장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미소녀 게임의 가능성이 발견됐다.

다들 동의하듯 이 가능성이란 것이 게임을 얼마나 잘 만들었느냐에 달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고로 90년대에 들어서자 어려운 퍼즐이나 액션을 진행해야 그림 한 장을 볼 수 있는 게임들은 사라졌고, 마우스 버튼만 누르면 모든 그림을 볼 수 있는 게임만 남았다.

게이머들의 수요는 역시나 그쪽이었고, 제작사 입장에서도 그림 몇 장과 텍스트만 있다면 팔리는 게임을 만들 수 있었다. 한마디로 미소녀 게임은 저비용 고효율의 장르였다. ‘란스 시리즈’나 ‘드래곤 나이트4’처럼 다른 장르와 결합하는 모습도 있었지만, RPG로서의 완성도는 높다 말하기 어려웠다.

90년대 후반, 미소녀 게임은 한 번의 큰 변화를 맞이한다. 윈도우 95와 다이렉트 X의 등장은 95년까지도 16색 컬러의 한계에 갇혀 있던 제작사들에겐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포토샵이나 페인터에서 그린 그림을 게임에 그대로 쓸 수 있게 되었고 음악 역시 MIDI의 한계를 넘어 CD롬이라는 새로운 매체에 집어넣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를 잘 탄 것이 바로 ‘리프’라는 제작사였다.

초기작인 DR² 나이트작귀(마작)으로 데뷔 후 필스노운(RPG)을 만들 때까지도 리프는 다른 회사와 별반 차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시즈쿠, 투하트 등의 연이은 대성공은 이 회사를 미소녀 게임사의 역사에 남도록 만들어준다.

이 게임들은 기존의 게임과는 사뭇 달랐다. 어드벤처 게임의 복잡한 요소를 전부 빼버리고, 예쁘게 그려진 그림 위에 큼지막한 글씨를 출력하여 스토리를 진행했다. 비주얼 노벨이란 장르의 시작이었다.

역시나 저비용 고효율이었다. 돈과 인력, 기술력이 부족했던 리프는 단순하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 속에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담아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게임은 무엇보다 내용이 재미있어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일깨운 셈이다.

하지만 성공작이 태어나면 아류작이 생기는 법. 많은 제작사들은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보다 적당히 예쁜 그림을 보여주며 캐릭터를 죽이거나 하는 식으로 억지감동을 창출해내려 애썼다.

동시에 캐릭터는 갈수록 어려졌다. 만 15세 미만의 캐릭터의 부적절한 게임이 범람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안 그래도 ‘야한 게임’이라며 괄시받던 미소녀 게임을 주류에서 더욱 벗어나도록 만들었다.

1999년, 드디어 일본에 청소년 보호법이 제정되었다. 만 15세 미만 미성년자의 성행위를 묘사한 게임은 출시가 불가능해졌다. 중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했던 거의 모든 미소녀 게임에 이 법률은 치명타를 날렸다.

고민 없이 엉성한 게임을 만들던 상당수의 제작사들은 소재와 시나리오의 다양성을 찾기를 어려워했다. 아마추어 그림작가들의 영입과 기술의 발달로 게임의 그림 수준과 그래픽은 발전하고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엇비슷한 게임에 식상해진 게이머들을 사로잡으려면 무언가 새로운 요소를 더해야 했다. 적당히 예쁜 그림과 감수성을 자극하는 시나리오 그리고 자극적인 이벤트만으로는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시장에서 소위 말하는 대박을 거두기 어려워졌다.

방향은 갈라지기 시작했다. 기술의 발달과 스토리의 발달이었다. ‘일루전’과 같은 회사는 3D 기술을 내세웠다. ‘미행2’와 같은 변태적인 발상과 스토킹을 통해 성인게임 중에서도 높은 수위의 작품을 만들기도 했지만, 고해상도 3D 그래픽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브러티쉬 마인’을 비롯한 다른 장르와의 적극적인 융합을 보여줬다.

대전 액션, 시뮬레이션, 슈팅 등 다른 장르와의 퓨전을 매우 의욕적으로 끊임없이 시도하며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다.

동인회사였던 ‘타입문’은 신전기라 불리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문학평론가 아즈마 히로키가 “신전기는 나스 키노코(타입문의 메인 시나리오 라이터)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단어”라 평할 정도로 타입문의 영향력은 방대했다.

신전기의 필요조건은 “일상”이며 충분조건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일상”이다.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주인공은 누군가의 만남(당연하게도 미소녀)을 통해 비일상의 세계로 진입한다. 설정에서부터 몰입감을 선사한 신전기의 스토리텔링은 큰 유행을 불러왔다.

니트로 플러스 역시 우로부치 겐을 필두로 다수의 신전기물을 제작했고, 비교적 최근작인 light사의 ‘Dies irae’ 역시 이러한 공식을 통해 성공했다.

미소녀 게임의 발전사를 살펴보았지만, 조금 관점을 달리하여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미소녀 게임의 정의에 대한 근본적인 부분이다. 한국에서 미소녀 게임을 흔히 미연시(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라 하는데, 여자 캐릭터와의 19금 요소가 포함된 연애사를 보여주는 게임을 통칭하여 일컫는 말로 쓰인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는 단어를 거의 쓰지 않으며, 장르가 시뮬레이션인 게임에 한해서만 사용한다. ‘두근두근 메모리얼’과 같은 게임의 경우에만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라 부른다는 이야기다. 미소녀이기 이전에 중요한 것은 어떤 장르의 게임인가 하는 것이다. 어드벤처 요소를 제거하자 비주얼 노벨이란 장르가 탄생했듯이 말이다.

달리 말해, 미소녀 게임이라는 장르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타입문의 경우 “앞으로 19금 게임은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비주얼 노벨로서의 퀄리티를 극상으로 끌어올린 ‘마법사의 밤’을 제작해 발표한 바 있다.

기존 비주얼 노벨과는 차원이 다른 화면연출과 이를 통해 펼쳐진 유려한 스토리텔링은 상대적으로 시나리오의 볼륨이 적음에도 많은 이들의 호평을 받았다. 미형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19금의 요소가 전혀 없음에도 이를 앞서 살펴본 미소녀 게임들과 동류로 볼 수 있을까? 슈팅에 미소녀 캐릭터가 나오거나 롤플레잉에 미소녀 캐릭터가 나온다고 무조건 우리가 아는 미소녀 게임으로 분류할 수 없듯이 말이다.

경쟁하려면, 그리고 그를 통해 성공하려면 미소녀 캐릭터를 벗기는 것만으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최근 눈에 띄는 현상 하나를 들어보자. 미소녀 게임 장르의 수요층은 고정된 상태로 존재한다. 때문에 게임은 계속해서 나온다. 재미있는 현상은 여기에 있다.

PS VITA가 발매된 후, PSP로 출시되는 작품들의 7할은 미소녀 게임이 되었다. PS VITA 역시 닌텐도 3DS에게 밀린 후로는 이러한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플랫폼은 차세대로 발전하지만, 미소녀 게임은 이미 지나간 흐름에 몸을 맡기고만 있다는 것이다.

저비용 고효율에만 매달린 채 말이다. 게임은 어디까지나 게임으로서의 즐거움을 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절대적 명제를 잊어버린 현 시대의 ‘미소녀 게임’을 과연 게임의 한 장르로 인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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