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과 대가 없이 작업하지만... '대 한국어화 시대'에 큰 공헌한 열정
불만 없이 유저 번역 버전 지속, 혹은 다른 게임 작업으로

한때, 번역에 나서주는 사람이 없으면 게임 자체를 접하지도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해외 게임이 출시될 때마다 당연한 듯 한국어 옵션을 선택해 실행하는 시대다. 물론 아직도 베데스다 게임처럼 이 악물고 언어 지원을 피하는 사례가 있지만, 거기에 비판이 쏟아진다는 것은 곧 극히 일부가 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는 한국어 더빙까지도 어렵지 않게 만나곤 한다.

이런 시대는 오래된 것이 아니다. 2013~2014년경 PS4 세대 시작에 발맞춰 '대 한국어화 시대'가 열렸고, 절대 한국어로 볼 수 없을 것 같던 게임들까지 하나둘 현지화를 시작했다. 국내 콘솔 관계자들의 노력, 그리고 게임을 사랑하는 한국 유저들의 열정적인 구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전까지 해외 PC-콘솔 게임 플레이 환경은 정반대였다. 일부 게임만 현지화되어 들어왔고, 나머지는 영어나 일본어 정도만 담긴 채 출시됐다. 정식 발매인데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유저들은 플레이를 위해 직접 해석하거나 번역집을 따로 구매해야 했다. 

가장 유명한 '팀 왈도'는 정해진 집단이 아니라 어디든 사용 가능한 팀명이다
가장 유명한 '팀 왈도'는 정해진 집단이 아니라 어디든 사용 가능한 팀명이다

그중 PC 게이머들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들이 있었다. 바로 아마추어 한국어화 팀이다. 보통 '한패팀'으로 줄여 불리던 이들은 순수하게 좋아하는 게임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여 작업을 시작했다. 

90년대 PC통신 시절부터 동아리처럼 커뮤니티가 형성됐고, 한국에 관심도 없던 게임들이 차츰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게임의 내부 파일을 바꾸는 것이었지만 게임사 측에서도 굳이 금지할 이유는 없었고, 일종의 '회색 지대'로서 유저들에게 큰 도움을 줬다.

비록 등 뒤에서 조용히 움직인 이들이지만, 한국어가 당연한 시대를 만든 공은 분명히 컸다. 과거에도 번역집을 넘겨가며 게임을 플레이할 코어 유저는 많지 않았다. 게임 자체에 현지화를 해줬기에 점차 유저들이 늘어날 수 있었다. 해외 게임사들이 한국에 관심을 가진 이유도, 이런 노력을 거쳐 시장성이 생긴 결과다.

90년대 비주얼 노벨들이 퍼지기 시작한 것도 유저 패치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90년대 비주얼 노벨들이 퍼지기 시작한 것도 유저 패치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발더스 게이트3'는 오랜만에 이 유저 패치팀이 활약한 자리였다. 단순히 패치가 가능하도록 한 점을 넘어, 공식 번역까지 이르게 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가교였다.

출시 당시 공식 한국어는 지원하지 않았다. 게임사 입장에선 합리적이었다. 라리안 스튜디오가 큰 규모도 아니고, TRPG 룰을 PC로 옮긴 CRPG는 아시아에서 지극히 비주류 장르다. 전작 2편이 국내 인지도가 조금 있었다 해도, 너무나 오래 전이라 현세대 유저들은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

CRPG 장르는 아마추어 번역 작업 난이도 최상으로 꼽힌다. AAA 게임이 우습게 보일 만큼 수많은 대사와 선택지가 존재하고, 그 대화문이 게임 플레이 핵심이다. 고유명사는 물론 고어나 은어도 많기 때문에 문장 하나하나가 어렵다. 

하지만 수년 전 얼리액세스 단계부터 자발적으로 참여한 아마추어 현지화팀이 있었다. 정식 출시와 함께 해외 리뷰에서 극찬이 쏟아지자 게임을 향한 관심이 급증했고, 번역에 동참하려는 인력은 더욱 늘어났다. 

여기에 인공지능(AI) 번역 기술도 활용되면서 방대한 텍스트는 빠른 속도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패치지만 걸작 플레이에 목 말랐던 유저들이 연이어 게임을 구매했고, 급기야 한국 스팀에서 한 달 넘게 수익 순위 최상위에 머무를 만큼 뜨거운 성적을 거뒀다.

힘겨운 영어 능력으로는 제대로 플레이가 어려운 게임이다
힘겨운 영어 능력으로는 제대로 플레이가 어려운 게임이다

한국어 지원 계획은 없다고 밝혔던 라리안 스튜디오의 계획도 급변했다. 12월 1일, 갑작스러운 패치를 통해 한국어가 공식 지원 언어로 게임에 추가된 것. 

국내 유명 번역 업체 무사이 스튜디오가 현지화를 담당해 독자적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동안 한국어 패치가 완성될 때까지 지켜보려던 유저들도 일제히 구매했고, 방송 콘텐츠로도 재차 애용하면서 또다시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고 있다.

완성도 막바지에 다다른 유저 패치팀 입장에서는 허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 불만 없이 조용히 각자의 길을 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타필드'나 '재기드 얼라이언스3' 등 또다른 미번역 게임 작업에 합류하기도 하고, 팀에 그대로 남아 유저 패치 버전을 완성하기 위한 인력도 있다.

유저 한국어 패치 작업은 대부분의 경우 아무 대가도 받지 않은 채 이뤄진다. 엄청난 작업량이 소요되며 스트레스도 있다. 이득은커녕 "왜 여기 번역은 이렇게 하냐", "패치 배포 방식은 왜 이러냐" 등 협조 아닌 '훈수'가 들어오기 일쑤다. 그저 이 작업을 완성하고 싶고, 모두가 한국어로 즐기는 모습을 보고 싶어 참여하는 순수 열정이다.

AI가 효과적으로 활용되어 감탄을 자아낸 '스타필드' 유저 패치
AI가 효과적으로 활용되어 감탄을 자아낸 '스타필드' 유저 패치

정말 유저 번역이 공식 현지화를 이끌어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국어는 '발더스3' 지원 언어 가운데 중국어에 이어 유이한 비 서구권 언어가 됐다. 해외 게임 가운데 일본어 없이 한국어만 지원하는 경우는 드물다. 

당연히 한국 스팀 1위를 장기간 차지할 정도로 뜨거운 구매 열기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짐작된다. 먼저 나서준 패치팀이 없었다면 CRPG 장르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게임에서도 한국 유저들이 즐길 수 있도록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유저 번역 패치팀을 공식으로 다룰 기회는 거의 없었다. 특정할 대상이 없고 드러내지 않은 채 움직인다. 아마추어들의 비공식 작업이라 당당하게 언급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한국 PC게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들이 없었다면 아직도 공식 한국어로 만날 수 없는 게임이 훨씬 많지 않았을까.

게임을 한국어로 즐기는 것이 당연해진 이 시대에, 기회를 빌어 한 번쯤 그들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발더스3'는 모처럼 찾아온 좋은 기회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이 모여 키워낸 이 시장 속에서, 그들의 대가 없는 노력이 오래 기억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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