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그린 만화에서 시작, 표준어 '며칠'을 둔 입장 차이 다뤄
신념과 결과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 통해 윤리학적 가치관 질문

[게임플] “수치심이 몰려온다”

게임 도중 맞춤법을 틀릴 때마다 마주했던 대사다. 하물며 하루에 수천 자를 글에 새겨넣는다는 사람이 맞춤법을 헷갈리다니, 부끄러움이 밀물처럼 들어와 차올랐다.

이토록 부끄러운 맞춤법 솜씨를 고해하도록 만든 게임은 만화가 ‘마사토끼’가 제작한 게임 ‘맞춤법 용사: 맞춤법에 너무 민감해서 주변의 빈축만 사던 내가 이세계에서는 용사라고?(이하 맞춤법 용사)’다. 이 불필요하게 긴 제목을 달고 나온 게임은 2019년 그가 그린 짧은 만화 한 편에서 시작됐다.

그는 문득 ‘며칠’이라는 말에 의문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몇’이라는 말은 어느 단위에나 붙을 수 있다. 몇 달, 몇 년, 몇 시간… 심지어는 가상의 단위를 만들어 붙여도 그 의미는 통한다. 그런데 오직 ‘몇 일’ 만은 예외다. ‘며칠’은 되지만, ‘몇 일’은 안 된다. 그의 의문은 “만약 ‘몇 일’을 허용한다면 국민들이 ‘며칠’파와 ‘몇 일’파로 나뉘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눴을 것”이라는 다소 황당한 상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게임은 바로 이 상상에서 시작된다. ‘이도니아’라는 세계는 ‘메치린데 왕국’과 ‘메디리오 왕국’으로 갈라져 첨예하게 대립한다. 클리셰대로 트럭에 치여 이세계로 향한 주인공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틀린 맞춤법을 지적하길 일삼던 불한당이다. 그는 정확한 맞춤법이 질서이자 정의로 작용하는 이세계의 규칙에 따라 맞춤법 배틀을 통해 상대를 무찌르는 ‘맞춤법사’로 활약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맞춤법을 틀리면 꼼짝없이 수치심이 몰려와 큰 피해를 입는다.
맞춤법을 틀리면 꼼짝없이 수치심이 몰려와 큰 피해를 입는다.

이도니아의 두 왕국의 맞춤법은 단 한 가지, ‘며칠’과 ‘몇 일’을 제외하면 완전히 동일하다. 메치린데 왕국은 ‘며칠’을, 메디리오 왕국은 ‘몇 일’을 표준어로 삼는다. ‘며칠’이 표준어인 세계에서 온 주인공은 자연히 메치린데 왕국에 합류해 빼어난 맞춤법 실력을 바탕으로 메디리오 왕국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선다.

이토록 허무맹랑한 만화적 상상을 한 편의 이야기로 빚어내는 마사토끼의 재주는 바로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그는 사소한 맞춤법 논쟁을 인간의 도덕론적 갈등으로 확장시킨다.

메디리오 왕국을 흡수한 메치린데 왕국은 메디리오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논의한다. ‘며칠’과 ‘몇 일’을 복수 허용하되 교육을 통해 천천히 ‘며칠’을 표준어로 제정하자는 온건파의 주장에 주인공은 반대표를 던진다.

오직 ‘며칠’만을 표준어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원래 세계의 맞춤법이라는 신념, 메디리오인의 인구수가 상대적으로 적으니 소수가 불편을 감수하는 편이 낫다는 근거가 뒷받침했다.

그러자 망국의 포로 신세가 된 메디리오 왕국의 왕은 그에게 반문한다.

“만약 전쟁의 결과가 뒤바뀐다면, 그리고 그가 옳다고 믿는 맞춤법 신념과 메디리오 왕국이 승리했다는 결과가 상충한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승리한 메디리오 왕국에 규칙에 따라 ‘몇 일’을 표준어로 인정할지, 아니면 신념에 따라 ‘며칠’을 표준어로 인정할지 그는 선택해야 했다. 사실 그가 믿는 맞춤법이라는 신념은 그 믿음에 비해 덧없이 유약하다.

우리나라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의된다. ‘자장면’과 함께 ‘짜장면’이 표준어로 인정되듯, 어쩌면 ‘몇 일’ 역시 다수의 교양인들이 두루 쓴다는 사실이 인정되면 얼마든지 표준어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칫 그릇될 수 있는 신념을 맹신하는 주인공의 선택은 사뭇 위험해 보인다.

임마누엘 칸트(왼쪽)과 제러미 벤담(오른쪽)
임마누엘 칸트(왼쪽)과 제러미 벤담(오른쪽)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행위자에게 주어진 의무 혹은 신념을 기준으로 삼을지, 혹은 그 행위의 결과를 기준으로 삼을지에 따라 의무론과 결과론이 갈라진다.

전자는 무언가의 수단이나 목적이 되지 않는 내적인 명령을 따르라는 칸트의 ‘의무주의’로, 후자는 최선의 결과를 불러오도록 행동하라는 벤담의 ‘공리주의’로 대표된다. 결국 마사토끼는 맞춤법 논쟁을 통해 의무론과 결과론이라는 윤리학의 오랜 갈등을 유저들에게 제시한 것이다.

혼란을 덜기 위해 첨언하자면, 의무론과 결과론 중 무엇도 정답은 아니다. 그렇기에 ‘틀린 것’은 없고, ‘다른 것’만 있다. 타당한 근거만 있다면, 무엇이 옳다고 믿을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다.

또한 ‘며칠’은 사실 ‘몇’과 ‘일(日)’이 합성어가 아니다. 실은 ‘사흘’, ‘나흘’ 등의 우리말에서 나타나는 접미사 ‘-을’에 ‘몇’을 더해 만들어진 ‘파생어’다. 문법적으로 ‘몇 일’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 경우 ‘며칠’이 아니라 음운의 끝소리 규칙에 따라 ‘며딜’이 표준발음이다.

맞춤법 용사는 RPG 메이커로 만들어진 게임답게 그래픽이나 연출은 다소 단순하지만, 그 내용이나 구성만큼은 상당하다. 오히려 이 단순함이 마사토끼의 이야기 솜씨를 더욱 빛낸다.

맞춤법 용사 외에도 마사토끼는 최근 '메타 용사의 모험', '지뢰용사: 지뢰찾기 초급을 겨우 깰까말까한 내가 이세계에서는 용사라고?' 등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와 같은 작품들을 작가의 포스타입을 통해 무료로 체험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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