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은 고작 네 번의 싸움으로 신화가 됐다"

[게임플]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는 일본의 실존 경주마들을 미소녀화한 게임입니다. 어떻게 이런 신기한 발상을 했느냐는 경악,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와 매출로 충격을 선사했죠. 카카오게임즈의 국내 서비스 발표로 기대감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비결은 캐릭터, 그리고 그 캐릭터들에 얽힌 서사에서 나옵니다. 하나의 스포츠 드라마를 보는 듯한 몰입감은 애니메이션에 이어 만화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매주 주요 캐릭터의 원본마 스토리를 살펴보고, 이것이 어떻게 IP로 재해석됐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존 팬들에게는 이야기를 되새기는 즐거움을, 입문자들에게는 캐릭터 이해와 새로운 스토리에 대한 재미를 드리려 합니다.



■ 데뷔와 동시에 뻗어나간 '초광속'

스포츠에 '만약'이란 없습니다. 하지만 간혹 예외는 있죠. 이번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아그네스 타키온, 아버지가 최고 종마 선데이 사일런스에 어머니는 오카상 우승마 아그네스 플로라. 형인 아그네스 플라이트가 일본 더비를 우승하면서 타키온 역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다만 조교가 비교적 늦어서 데뷔전은 3번 인기에 그쳤지만요.

이 데뷔전에서, 타키온은 3마신 반 차이로 압승합니다. 

이날 세운 1펄롱(200미터) 타임 '10초 8'은 일본 전체를 통틀어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기록입니다. 비록 신마들끼리 붙은 경기지만 격이 다른 스피드였죠. "괴물 같은 신인이 나타났다!"며 모든 관심이 몰리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다음 경기인 라디오 탄파배 3세 스테이크스, 여기서는 신마 2천미터 신기록을 세워버립니다. 정글 포켓, 크로후네 등 촉망받는 동기 유망주들을 2마신 반 차로 따돌리면서. 

우승 직후 카와치 히로시 기수는 "차원이 다른 말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했습니다. 뛸 때마다 새로운 최고기록이 세워지니 당연한 이야기죠. 어느 정도였냐면, 세 번째로 야요이상에 출전을 밝히자마자 다른 말들이 줄줄이 출전을 포기해버릴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고작 8마리만 출전한 야요이상에서 타키온은 당연히 승리. 격차는 더 벌어진 5마신. 데뷔부터 차원이 달랐는데 갈수록 더 압도적이었습니다. 

클래식 G1의 첫 관문 사츠키상에서 타키온 단승 예측률은 당시 기준 역대 2위였던 59.4%. 모두의 당연한 예상에서 이변은 없었습니다. 마군을 평온하게 헤집고 튀어나와 가장 먼저 골인, 클래식 '우선 1관'을 따냅니다.

4전 전승, 네 경기 모두 충격적인 압승. 클래식 3관은 딴 것이나 마찬가지인 분위기고, 더 나아가 경주마의 세대를 바꿀 절대 강자의 탄생에 모두가 들썩였지만...

네, 타키온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아그네스 타키온 원본마 (사진: 위키피디아 유저 'Goki')
아그네스 타키온 원본마 (사진: 위키피디아 유저 'Goki')

■ 허무한 끝 - 거대한 'IF'의 시작

사츠키상 우승에서부터 2주 뒤 비보가 날아듭니다. 타키온의 왼쪽 앞다리에 굴건염 발생. 더비를 나갈 수 없게 됐고, 이어 경주마로서의 생명을 이어갈 수 없다고 판단해 은퇴까지 발표되고 맙니다. 

괴물 신인이 부상 등 여러 사고로 좌절하는 일. 여기까지는 스포츠에서 흔하죠. 이게 전부였으면 이 말의 이야기를 쓸 일도 없었을 테고요.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타키온의 동기 신예들이 일제히 날갯짓을 시작했습니다.

정글 포켓은 바로 이어진 더비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곧바로 고마들도 함께 참여하는 재팬 컵에서 강렬한 승리를 따냅니다. 쿠로후네는 사상 최초로 잔디와 더트 G1을 동시 재패하는 대기록을 남기는 말이 되고요. 더트 경주에서 세운 신기록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았습니다.

우마무스메에도 출연하는 맨해튼 카페는 킷카상에 이어 같은 해 아리마 기념을 재패, 다음 해 텐노상(봄)까지 우승하면서 역대 장거리마 계보에 이름을 올립니다. 그밖에 타카라즈카 기념 우승마 단츠 프레임도 무시할 수 없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모두 타키온과의 대결에서 근처도 따라붙지 못한 채 참패했던 말들. 이들이 업적을 쌓아나갈수록, 팬들과 관계자들의 의문은 한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체 타키온은 얼마나 강했던 거지?"

"그 말은 고작 네 번의 싸움으로 신화가 됐다"
- JRA 사츠키상 '아그네스 타키온' CM 중에서

여기서 끝났다면 그저 '미지의 영역' 정도로 남았을 겁니다. 그런데 타키온은 한 가지를 더 증명해버리고 맙니다. 그건 바로 본인의 유전자였죠.

은퇴 뒤 샤다이 스탈리온 스테이션에서 종마가 된 타키온은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혈통도 좋았고, 보여준 능력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로 커리어가 너무 일찍 끝난 만큼 '역대급'이 될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까지는 많지 않았습니다.

성과는? 선데이 사일런스 이래 최고의 종마 활약. 

극초기 자식들이 데뷔하는 2005년부터 곧바로 승리를 쌓아나가기 시작하더니, 2007년에는 자마 연간 승리수 134승을 달성합니다. 이 기록은 훗날 딥 임팩트라는 역사적 기준점이 탄생할 때까지 내국산 종마 신기록이었죠.
 
대표적 산구로는 딸 다이와 스칼렛이 있습니다. 보드카와 함께 세기의 암말 라이벌 매치를 펼쳤고, 37년 만에 암말의 아리마 기념 재패라는 쾌거를 달성한 명마죠. 우마무스메 인기 캐릭터로 등장하면서 타키온과 이야기에서 자주 얽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타키온은 종마 생활마저 강렬하되 짧았습니다. 2009년, 급성 심부전으로 요절하고 맙니다. 당시 나이 11세. 아직 창창한 나이였으니 업계의 허탈함과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타키온은 떠난 뒤 수많은 상상의 여지를 남겼습니다. 이 말이 조금만 더 건강했다면, 혹은 관리가 더 철저했다면? 부상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야요이상 때 엉망이었던 마장만 없었다면? 하다못해 종마 생활에서 급사하지 않고 조금 더 이어나갔다면?

이 정도면 꽤나 합리적이면서 여운 남는 'IF'의 주인공 아닐까요? 

■ "자, 실험을 시작하겠네"

게임으로 옮길 때 타키온 같은 일화는 독특하면서도 까다롭습니다.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지만 대부분 은퇴 뒤 이야기. 육성 스토리를 꾸밀 때 경주마 시기 여정이 짧으면 넣을 만한 스토리가 없는데요. 그렇다면 타키온 개인의 스토리는 어떻게 꾸며야 할까요?

우마무스메의 선택은 역발상이었습니다. '가설 그 자체를 캐릭터화'하는 것.

나이스 네이처와 킹 헤일로의 이야기를 하면서 '우마무스메 게임에서 꼭 봐야 할 스토리 TOP3'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죠. 셋 중 나머지 하나가 바로 아그네스 타키온입니다.

타키온은 우마무스메에서 매드 사이언티스트 형태의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천재지만 레이스에 진심을 다한 적이 없고, 온갖 기이한 실험에 몰두해 정신이 나간 것 같지만 또 친화력은 있어서 미워할 수 없는 스타일이죠. 

2차 창작에서도 최고 감초 중 하나로 자주 등장합니다. 서로 몸이 바뀌거나 투명인간이 되는 등 비현실적인 소재를 쓰고 싶으면 "아무튼 타키온이 약 만들어줌" 같은 전개로 개연성을 메꿔버리는 치트키거든요. 

개인 스토리에서는 트레이너가 무려 모르모트(실험체)로 불리면서 수상쩍은 약을 마시기까지 합니다. 레이스를 거부하는 타키온과 그 가능성에 매혹된 트레이너의 만남으로 인해 육성 이야기가 시작하게 됩니다.

타키온은 연구에 몰두한다는 이유로 클래식 3관 도전을 거절하지만, 트레이너의 끝없는 설득으로 첫 관문 사츠키상에 출전합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지만, 타키온은 어두운 얼굴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죠. "플랜A에서 플랜B로 선회하기 최적의 시기"라는.

그리고 일본 더비를 앞두고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맨해튼 카페는 "타키온의 달리기가 예전과 달라진 것 같다"고 말합니다. 타키온은 한밤중 훈련장을 달리면서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고, 슬슬 자신의 플랜을 선택하기로 했다면서 트레이너에게 어떤 선언을 합니다.

과연 타키온이 말한 '플랜B'는 무엇이었을까요. 원본마의 마지막 레이스인 사츠키상 이후 달리기가 달라진 이유는, 그리고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연구의 정체는? 유저들에게 가장 큰 호평을 받았던 타키온 육성 스토리의 결말은 게임에서 직접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1성 우마무스메이기 때문에 누구든 조건 없이 육성이 가능합니다.

비록 1성이지만, 팀 레이스에서 꽤 쏠쏠하게 써먹을 수 있는 중거리 요원
비록 1성이지만, 팀 레이스에서 꽤 쏠쏠하게 써먹을 수 있는 중거리 요원

■ 존재하지 않았기에 무한해지는 이야기

'타키온'의 사전적 의미를 한국물리학회의 물리학백과에서 찾아봤습니다.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성질을 가진 '가상의 입자'"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실험적으로 존재가 발견된 적도 없지만, 그 논의 과정으로 인해 각종 이론을 깊게 파고들게 되는 가치를 가진다고 합니다. '가설 이론'으로서 양자장론, 우주론, 끈 이론 등 각종 학계에서 활발하게 연구되는 소재입니다.

말 이름과 그의 마생이 비슷하게 따라가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타키온'은 소름 돋을 정도입니다. 마치 이 말의 운명과 사후의 존재감을 미리 내다보고 이름을 지은 것 같거든요.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나타나 빛처럼 사라져버리고, 가상의 이야기를 남긴 채 지금까지도 재생산되는 말. 이런 빛나는 소재를 매력 넘치는 캐릭터와 흥미로운 시나리오로 풀어낸 사이게임즈의 해석 능력에도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분명, 스포츠에 '만약'이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말 아무런 '만약'이 없다면 스포츠에서 이야기가 남을 만한 소재는 극히 일부밖에 없을 겁니다. 실제로 이룬 업적만큼이나, 이루지 못하고 사라진 수많은 가능성은 또다른 여운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그네스 타키온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 아닐까요.

 

(NEXT: ⑪ 토카이 테이오 - 천재의 끝에 새긴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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