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코너 앞에서 끝나버린 경치, 우마무스메가 이 말을 기억하는 법

[게임플]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는 일본의 실존 경주마들을 미소녀화한 게임입니다. 어떻게 이런 신기한 발상을 했느냐는 경악,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와 매출로 충격을 선사했죠. 카카오게임즈의 국내 서비스 발표로 기대감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비결은 캐릭터, 그리고 그 캐릭터들에 얽힌 서사에서 나옵니다. 하나의 스포츠 드라마를 보는 듯한 몰입감은 애니메이션에 이어 만화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매주 주요 캐릭터의 원본마 스토리를 살펴보고, 이것이 어떻게 IP로 재해석됐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존 팬들에게는 이야기를 되새기는 즐거움을, 입문자들에게는 캐릭터 이해와 새로운 스토리에 대한 재미를 드리려 합니다.


■ '광기의 재능'

최정상 등급 레이스, G1 경주에서 승리해본 경주마 기반 캐릭터는 우마무스메에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G1 1승에 불과하면서도 세기의 명마 중 하나로 기억되는 말이 있습니다. 

'사일런스 스즈카', 일본 최고의 종마로 꼽히는 아버지 선데이 사일런스와 마주의 관명인 '스즈카'가 합쳐져 생긴 이름입니다. 1997년 데뷔전부터 7마신 차 압승을 거두면서 주목을 한 몸에 받았고, 클래식 시즌을 석권할 1순위 후보로 꼽히기 시작했죠.

당시 다른 말에 타고 있던 일본 최고의 기수 타케 유타카가 스즈카를 보고 "이런 말을 타지 못하는 건 비극"이라는 극찬을 남기기도 했는데요. 이 날을 계기로 둘의 인연은 훗날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스즈카의 잠재력은 쉽사리 터지지 않았습니다. 제어하기 어려운 성미와 나쁜 버릇 때문에 페이스 관리가 되지 않았던 겁니다. 

다음 대회인 야요이상에서는 아예 기수를 내던지고 게이트 아래로 기어나가는 소동을 일으키는 등 출발부터 망쳐버리고 8착, 겨우 출전한 일본 더비 역시 기수 지시를 듣지 않다가 발이 묶이면서 9착에 그치고 맙니다. 

가을 시즌에 접어들어서도 텐노상(가을) 6착, 마일 챔피언십은 무려 15착으로 침몰. 잘 풀리면 무시무시한 괴력을 보이지만 대부분 경주 자체를 제대로 치르질 못하니, 관중들 사이에서는 '광기의 재능'이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분명 무서운 재능을 가졌는데, 이 성미를 과연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거죠.

사일런스 스즈카 원본마 (사진: 위키피디아)
사일런스 스즈카 원본마 (사진: 위키피디아)

■ '이차원의 도망자', 각성하다

그리고, 다시 타케 유타카 기수가 등장합니다. 

그동안 스즈카를 유심히 관찰해온 그는, 홍콩 국제 컵에서 한번 콤비를 이룬 것을 계기로 자신이 스즈카에 계속 타겠다고 나섭니다. 가만히 있어도 제발 자기들 말에 기승해달라는 요청이 빗발치는 전설의 기수인데도, 이 말의 가능성을 확신했던 겁니다.

"이 말은 억지로 제어하려 들면 안 된다. 최대한 마음껏 달리게 해야 한다."

타케 유타카가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스즈카가 가진 엄청난 에너지와 폭발력을 억누르지 않는다는 전략. 그 뒤로 스즈카는 그냥 도주가 아닌 '대도주'로 달리게 됩니다. 

그 판단을 계기로, 사일런스 스즈카는 완전히 다른 경주마로 변신합니다. 고마 시즌에 들어선 1998년, 스즈카는 타케 유타카의 기승 아래 승리의 폭주를 시작했습니다. 단 한 번도 1착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은 골드 쉽 못지않은 기행을 펼치기도 했다
어린 시절은 골드 쉽 못지않은 기행을 펼치기도 했다

상반기 레이스 중 백미는 킨코상, 만만치 않은 G2 레이스였습니다. 언제나처럼 스즈카는 대도주로 뛰어나갔습니다. 후발주자들에 비해 5마신 이상 넉넉하게 벌어진 차이였죠. 당연하게도, 제3코너부터는 슬슬 후위 그룹이 도주마를 따라잡을 시간입니다. 분명 그래야 하는데.

관중들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본 적 없었던 기묘한 위화감, 이어서 찾아오는 비상식적인 깨달음. 그 깨달음이 번져나가자 웅성임은 경탄, 환호성, 박수로 바뀌었습니다.

오히려, 차이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

심지어 최종 직전에 들어가서도 스즈카는 어느 말보다 빠른 스퍼트를 보였습니다. 차이는 마지막까지 벌어지기만 한 채로, 압권의 레이스를 펼치면서 혼자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전광판에는 10마신 이상 차이를 뜻하는 '대차'가 표기됐습니다. 물론 코스 신기록이었죠.

킨코상을 계기로 스즈카에게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혼자 다른 차원에서 도주극을 펼친다는 의미로 붙은 이름, '이(異)차원의 도망자'가 이 말의 새로운 이름이었습니다.

킨코상(G2)에서 중상 경기라고 믿어지지 않는 격차를 보인 사일런스 스즈카
킨코상(G2)에서 중상 경기라고 믿어지지 않는 격차를 보인 사일런스 스즈카

■ "어디까지라도 도망쳐주마!"

압도적인 4연승으로 기세를 올린 스즈카는 이어진 타카라즈카 기념에서도 쟁쟁한 명마들에게 한번도 추격을 허용하지 않고 우승을 차지합니다. 5연승, 그리고 첫 G1 재패.

무려 G1 우승인데 설명이 짧죠? 그 다음 경기가 메인 디시라서 그렇습니다. 마이니치 왕관, 비록 G2 경기지만 그 어떤 G1보다 많은 관중과 관심이 여기에 몰렸습니다. 한 살 어린 '괴물' 외산마 두 마리, '엘 콘도르 파사'와 '그래스 원더'가 여기 출전한 겁니다. 우마무스메 팬들에게는 역시 익숙한 이름이죠.

'당대 최강의 3강'이 격돌하는 대결을 보기 위해 무려 13만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습니다. 스즈카는 여느 때처럼 채찍 한 번 사용하지 않고 먼 발치로 앞서나갔습니다. 그래스 원더가 제4코너에 들어서면서 먼저 스퍼트를 걸었고, 두 번째로 엘 콘도르 파사가 따라붙었습니다.

하지만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스즈카는 이번에도 도주마의 최종직선 스퍼트라는 '말이 안 되는' 질주를 펼치고 있었고, 그 스피드는 어떤 말보다 빨랐습니다. 여유로운 차이로 1착 골인하는 순간은, 당대 최강 경주마가 결정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훗날 이 결과가 더 대단하게 평가된 것은, 엘 콘도르 파사의 일본 레이스 유일한 1패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엘 콘도르 파사의 기수 에비나 마사요시는 "그림자조차 밟지 못했다"는 말로 스즈카의 강함을 표현했고요. 

1998년 모든 레이스를 압승으로 장식한 스즈카는, 드디어 중거리 경주마로서 최종 목표였던 텐노상(가을)로 향했습니다. 

■ 침묵의 일요일

모든 조건은 완벽했습니다. 당일 스즈카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고 합니다. 날씨도 완벽했고, 도주마에게 최고 조건인 1번 게이트 배정까지. 뚜렷한 경쟁마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압도적인 1번 인기였고요.

그해 스즈카의 모든 레이스는 초월적이었지만, 타케 유타카의 회고에 따르면 그날은 그중에서도 최고의 주행이었습니다. 1천미터 통과 기록은 마이니치 왕관 때를 뛰어넘는 57초 4.

힘이 빠지기는 커녕, 속도는 더욱 올랐습니다. 후발 경주마들과는 이미 10마신 이상 까마득한 거리. 무려 G1 레이스에서 맛보는 압도적인 도주극. 스즈카는 그동안 알고 있던 레이스의 상식을 뛰어넘는 질주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스즈카는 그렇게 제3코너 막판에 자리잡은 큰 느티나무를 지났습니다. 세상에 없던 질주를 지켜보는 환호의 소리로 경기장이 가득 찼습니다. 훗날 회자될 최고의 주행, 경주마 역사의 한 순간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곳이 사일런스 스즈카의 마지막 장소였다는 것을.

스포츠신문 1면에 도배될 만큼 충격적 비극
스포츠신문 1면에 도배될 만큼 충격적 비극

"사일런스 스즈카, 사일런스 스즈카에게 고장이 발생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4코너에 들어가지 못하고 레이스를 마친 타케 유타카, 침묵의 일요일!"

느티나무를 지난 스즈카는 더 이상 달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부서진 다리를 절면서 트랙 외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죠. 14만 관중이 내는 소리는 비명으로, 이어 침묵으로 바뀌었습니다.

경기 이후 발표된 진단 결과는 실낱 같은 희망마저 앗아갔습니다. 왼쪽 앞다리 분쇄골절. 회복 불가능. 수술하더라도 평생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상태. 

남은 답은 단 하나, 안락사뿐이었습니다.

스즈카의 죽음은 모든 관계자들에게 평생 남을 충격이었습니다.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기로 알려진 타케 유타카는 그날 밤 생애 처음으로 정신이 나갈 만큼 술을 마셨습니다. 20년이 지난 인터뷰에서도 다시 타고 싶은 말을 묻는 질문에 곧바로 스즈카를 꼽는 한편,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며 당시의 자세한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고요.

하시다 미츠루 조교사는 주인이 사라진 스즈카의 마방에서 종일 통곡했고, 언제나 스즈카를 돌보던 카모 츠토무 구무원은 차마 다른 말을 맡지 못한 채 일을 그만뒀습니다. 조교사는 스즈카의 속도가 뼈 내구성의 한계를 넘어버리고 있었던 것이 비극의 원인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 스즈카의 이복동생 '스페셜 위크'가 같은 대회인 텐노상(가을)을 차지합니다. 그 위에는 마찬가지로 타케 유타카가 타고 있었습니다. 캐스터는 이를 두고 "1년 늦은 텐노상 가을"이라는 멘트를 남기죠. 

이런 두 말 사이 조금은 아련한 연관성은, '우마무스메'에서 서로의 관계망으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됩니다.

■ "선두의 경치는 절대 넘겨주지 않아"

우마무스메에서 사일런스 스즈카는 스페셜 위크와 함께 핵심 타이틀 캐릭터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원본마 인연에 착안해 스페셜 위크의 선배이자 지향점, 동시에 소중한 친구로 그려지죠. 

애니메이션 시즌1에서도 주연급 비중을 차지합니다. 다행히, 우마무스메 세계관에서 캐릭터가 죽는 일은 없어요. 레이스 중 선수생명이 끝날 만큼의 부상을 입지만, 재기를 향해 꿈을 키우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 과정은 우마무스메 주제와 연결되기도 하고요.

특히 호평을 받은 부분은 작년 12월 업데이트된 게임 메인스토리 5장 'scenery'였습니다. 온전히 스즈카의 이야기로 채워진 챕터인데요. 스스로 힘을 다룰 줄 몰라 헤매다가 점차 성장해가는 과정을 실제 스토리 기반으로 충실하게 그려냅니다.

다른 팀에서 팀 스피카로 옮겨와 자신의 달리기를 깨우치는 전개도 타케 유타카와의 만남에서 착안한 듯하고요. 아무도 따라올 수 없게 질주하는 스즈카의 달리기를 극한의 속도감으로 살려 표현한 애니메이션도 좋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시작부터 레이스 중 큰 느티나무 속 어둠으로 사라져가는 모습을 표현하면서 긴장감을 주기도 합니다. "우마무스메의 한계를 벗어난 달리기"라면서 다리가 위험하다는 힌트를 흘리고요. 모두가 결말을 아는 이야기인 만큼 흐름은 고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최종 파트는 물론 텐노상(가을)입니다. 원본마의 비극과 그것을 이겨내고자 하는 소망, 게임에서는 어떤 결말로 그려냈을까요? 직접 아래 애니메이션 파트로 감상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미처 자막을 달진 못했지만, 연출만으로도 이해에 문제는 없을 겁니다.

■ '영광의 일요일'

우마무스메 게임에서 스즈카를 육성하며 시니어 시즌 텐노상(가을) 레이스를 우승하면, 손을 흔들며 뛰는 스즈카와 함께 아나운서의 이런 멘트가 들립니다.

"영광의 일요일의 주역은 사일런스 스즈카! 
제4코너 저편에서 방패의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실제 스즈카는 제4코너를 앞에 두고 쓰러졌습니다. 라이스 샤워와 함께 우마무스메에서 레이스 중 비극을 겪은 유이한 말이죠. 과거 일은 바꿀 수 없지만, 게임에서라도 이 결과를 바꾸고 실제 이야기를 기억하게 만드는 정성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사일런스 스즈카는 전성기가 짧았고, 슬픈 최후로 기억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어느 경주마보다 강렬하게 달렸습니다. 누구보다 달리고 싶은 열망이 강했던 성격은 상식을 파괴하는 대도주를 탄생시켰고, 그 질주로 최강에 오르는 '압도적 낭만'을 보여줬죠. 이차원의 도망자라는 별명이 이보다 어울릴 수는 없습니다.

스즈카를 향한 기록에서는 애통함만큼이나 미안함을 표현하는 부분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경주마는 분명 인간의 필요에 의해 탄생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되살려내는 것도 우리 몫이 아닐까요. 그것이 아마, 스즈카의 일요일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일 겁니다.

 

(NEXT : ⑩ 아그네스 타키온 - '가능성'의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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