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으로 기록되지 않아도, 낭만으로 기억되는 선수

[게임플] 2022년 2월 22일. 어떤 프로게이머를 추억하기 가장 좋은 날이다.

세상에 2인자는 많다. 1인자의 숫자만큼, 혹은 그 이상 존재한다. 출중한 실력을 가졌지만 연거푸 문턱에서 좌절해 우승의 영광을 누려보지 못한 선수도 많다. 

그중 홍진호는 '유별나게' 독특한 인물이다. 한 명의 2인자를 넘어, '2'라는 숫자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그마저 예능인 박명수에 이어 2번째로 떠오른다는 농담도 나오지만. e스포츠 팬과 게이머들에게는 무조건 첫 번째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2인자 가운데 홍진호는 무엇이 특별했을까. 스토리의 시작은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 첫 부흥기인 2001년이었다. 

임요환이 기상천외한 전략으로 각종 대회를 휩쓸며 '테란의 황제'로 불리기 시작할 때, 패기 넘치는 신성 한 명이 라이벌로 떠올랐다. 별명은 '폭풍저그', 이름은 홍진호였다. 잘 하는 것을 넘어서, 눈을 뗄 수 없는 플레이를 만드는 선수였다.

2001년 코카콜라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결승 당시 홍진호
2001년 코카콜라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결승 당시 홍진호

저그는 초반에 시간을 끌고 후반 폭발적인 물량으로 승부를 내는 종족이었다. 하지만 홍진호는 시간을 끌지 않았다. 초반부터 상대를 정신없이 몰아붙여서 결국 뚫어내고 승리를 따냈다. 그런 스타일은 종종 있었지만, 홍진호만큼 압도적인 선수는 없었다.

코카콜라배 스타리그 결승에서 임요환과 기대 이상의 명승부가 펼쳐지자 라이벌 구도는 자연스럽게 완성됐다. 비록 임요환이 대회 2연패를 달성했지만, 홍진호가 앞으로 많은 우승컵을 들어올릴 것이라는 생각을 누구나 하곤 했다.

그러나, 그 이후 홍진호는 메이저 대회 결승에서 번번이 가로막혔다.

결승에서 항상 당대 최강의 테란 선수들을 만났고, 홍진호의 저그는 종족 상성에서 불리했다. 맵 밸런스마저 테란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경우가 잦았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매번 명승부를 펼쳤다. 그리고, 졌다.

코카콜라배 임요환을 상대로 홀 오브 발할라 난전, 올림푸스배 스타리그 결승에서 서지훈과의 처절한 기요틴 엘리전, TG삼보 MSL 결승에서 최연성과의 유보트 혈전 등.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승부 중 수많은 경기에 홍진호가 있었다. 단지 마지막 경기를 이기는 일이 없었을 뿐이다.

선수 은퇴 뒤에도 수많은 방송과 광고에 함께 출연한 임요환과 홍진호
선수 은퇴 뒤에도 수많은 방송과 광고에 함께 출연한 임요환과 홍진호

그의 작은 키에서 나온 별명 '콩'은 언젠가부터 '2'를 대체하는 뜻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우승을 못하고 준우승만 많은 선수를 두고 '콩라인'으로 분류하는 유행도 모든 스포츠 종목에서 퍼졌다.

운도 없었다. 올림푸스배 결승은 상대 서지훈이 최강으로 불리는 맵 비프로스트가 1,5경기에 배치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1경기 우세했으나 게임 오류 발생으로 재경기를 해야 했다. 결국 5경기에 쓰려고 했던 전략을 사용해 첫 경기를 가져왔지만, 혈전 끝에 2:3으로 패배하게 된 것. 승부에 만약이 없다고 해도 아쉬운 일은 분명했다.

큰 대회 우승도 종종 있었다. 2002년 우승한 KT배 온게임넷 왕중왕전은 당시 정규 대회나 다름없는 권위를 가졌다. 우승자가 다음 시즌 1시드를 받는 점도 정규와 같았다. KPGA 위너스 챔피언십처럼 당대 최고 선수들이 모인 대회에서도 우승했다. 

그러나 스타 종목이 양대 리그로 정비되면서 '이벤트전만 우승'이라는 기믹이 붙을 뿐이었다. 점점 굳어지는 준우승자의 프레임도 우승이 없다는 인식에 한 몫을 했다. 그야말로 '우주가 버린 것 같은' 콩의 운명이었다.

전설의 '3연벙'은 종족 상성과 맵 밸런스 붕괴의 하모니였다. 화면은 1경기 맵 펠레노르
전설의 '3연벙'은 종족 상성과 맵 밸런스 붕괴의 하모니였다. 화면은 1경기 맵 펠레노르

혹자는 스포츠의 세계에서 "오직 1등만이 기억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홍진호는 그 반례다. 존경할 만한 2등은, 누구보다 오래 기억될 수 있다.

그의 프로 시절을 돌아볼 때 증언은 언제나 일치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했고, 선배와 후배 선수들에게 모두 최고의 동료였다는 것. 재미있는 경기 스타일과 인간적 매력, 재능과 노력까지 모두 갖춘 스포츠맨이었다.

정정당당한 승부를 즐기기로도 유명했다. 도발이나 심리전을 잘 걸지 않았다. 저그가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맵 패러독스에서 홀로 종족변경을 하지 않고 저그로 도전했을 만큼 의무감도 강했다. 어쩌면 그래서, 이기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는 승부의 세계에서 마지막 매듭을 짓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선수였던 만큼 기적을 만들어낼 때 영향력도 컸다. 이제 실력으로는 끝났다고 생각한 공군 에이스 시절, 당시 최강 프로토스 김택용을 만나 특유의 폭풍저그식 몰아치기로 대이변을 만들어낸 경기는 아직도 수많은 시청자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미련하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바꿔 말하면 '낭만'이라는 단어였다. 그 낭만은 비록 우승으로 기억되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에게 추억으로 간직되는 비결이 됐다.

홍진호는 최고의 프로게이머 중 하나였고, 이제 포커 플레이어이자 방송인으로 또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일반 대중에게 가장 크게 알려진 계기는 '더 지니어스' 첫 시즌 우승일 것이다. 그때도 홍진호답게 이겼다. 정치나 속임수 대신 게임 실력으로 홀로 맞섰고, 무수한 명장면으로 전율을 연출해냈다. 홍진호식 낭만을 꽃피운 순간이었다.

이제는 연례행사가 된 '콩콩절(2월 22일)'이 '콩콩년'과 함께 찾아왔다. 2222년이 되기 전까지는 홍진호를 이야기하기 가장 좋은 날이다. 2월 22일 20시, 임요환과 홍진호가 대결하는 '임진록' 이벤트도 열린다. 

'콩콩절'은 다르게 보면 단순한 인터넷 속 놀이거리다. 존경보다 놀리는 의미가 훨씬 강하다. 그래도 이제 홍진호에게 쓰는 '콩'은 놀림 이상의 존중을 담고 있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간혹 놓치는 이야기를 말해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홍진호는 영원한 2인자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드라마는 1순위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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