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역사가가 말해주는 한국 게임의 역사

[게임플] 전세계 게임 산업에 있어 한국은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라인게임, e스포츠 등 여러 게임 산업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는 최근 5G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더 크게 발전할 것이라 기대 받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게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오늘(26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 넥슨 사옥에서 열린 넥슨 개발자 컨퍼런스(NDC 2019)에서는 이를 주제로 한 강연이 열렸다.

‘발굴되지 않은 한국 게임의 역사’라는 주제로 강연대에 오른 오영욱 게임 역사 연구가는 지금까지 모아온 자료를 토대로 한국 게임의 역사를 설명했다.

그가 말하는 한국 게임의 역사는 1987년을 기점으로 나뉜다. 이전에는 기계식 오락기, 아케이드, TV게임들이 주를 이뤘으며, 90년대에 들어서서는 아마추어 게임문화가 주축을 이뤄 한국 게임의 역사가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1983년 이전에는 ‘Coin-Op Macine’, 즉 자동판매기라 불리는 아케이드 이큅먼트 게임들이 등장했다. 이때 국내에도 어린이회관 과학 오락실(1972), 남산 어린이회관(1970~1974) 등의 오락실이 보급됐으며, 이곳을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게임은 기계식 오락기였다.

구슬치기, 로케트포, 우주괴물, 쥐잡기, 하키 등 오 연구가가 수집한 문헌에는 여러 게임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주로 LED의 깜빡임을 이용한 게임, 사격 등이 주를 이뤘다고 한다.

수출의 강국답게 게임도 수출로부터 발전이 시작됐다. 당시 기사, 자료를 살펴보면 한국에서는 개발되지도 않았던 비디오게임이 6천 개나 수출됐으며, 이들 대부분은 해외 게임사들의 게임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1978년에는 국내에서 수출 박람회도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기계어를 활용한 게임은 1981년을 기점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게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청계천에서 직접 부품을 만들고, 잡지를 서로 교환하기도 했으며 이후 ‘마이콤’이라고 부르는 마이크로컴퓨터도 등장했다.

국산의 첫 퍼스널컴퓨터는 삼보전자에서 개발했다. 금성, 삼성에서도 연이어 컴퓨터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삼성에서는 자사의 컴퓨터를 활용해 소프트웨어 공모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는 각지의 게임, 컴퓨터에 관심 있던 이들을 끌어 모았다.

1983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국가에서 정보 정책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한국의 미래는 정보산업이다’라는 모토아래 컴퓨터 산업에 대해 중점을 뒀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창간한 잡지에서 금성사, 동양나이론, 삼성전자공업, 엘렉스 등의 게임 5개씩을 발췌해 게임 리뷰를 담기도 했다.

1984년에는 이른바 ‘세운상가 키즈’들이 등장했다. ‘학생과 컴퓨터’ 4월호에서는 한 기자가 세운상가를 돌아다닌 경험담을 담은 기사가 실렸다. 주로 학생들이 모여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었는데, 이때 당시에도 ‘부모님이 알면 큰일나니 사진은 안된다’라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1985년 8비트 콘솔 게임기인 대우 ‘재믹스’의 개발, 86년 케텔(KETEL) 서비스의 시작을 기점으로 국내 게임은 큰 발전을 이루게 된다.

1987년 컴퓨터 프로그램 보호법과 함께 미리내 등의 게임사가 설립되기 시작했으며, 국내 최초의 한글 게임인 ‘신검의 전설’이 등장했다. 고등학생들이 만들었다는 해당 게임은 당시 기록에 ‘화제의 베스트셀러’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꽤나 많이 팔린 작품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국내 게임 개발은 92년 케텔에서 설립된 ‘개오동’에서 개발 관련 커뮤니티가 등장하며 빠르게 그 세를 불려나갔다. 현재 IMC게임즈의 김학규 대표의 이름도 당시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른바 ‘국산 스파’라고 불리는 국산 스트리터파이터를 만든 정영덕 개발자의 기록도 있었는데, 오 연구가의 말로는 현재 어디 계신지는 모른다고 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게임 잡지들이 창간되고 일본 중심의 개발문화들이 게임 잡지를 통해 소개되면서, 국산 게임들이 출시되기 시작했다. 현재 유명한 PC게임 개발자들도 이들 게임의 개발에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3년에는 하이텔 게임제작자 동호회가 설립되면서 개발자들을 인터넷을 통해 모을 수 있게 됐으며, 오 연구가가 수집한 기록에서는 넥슨의 구인 공고문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나우누리 게임제작자포럼 등에서 게임이나 개발자료 공유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일본 문화가 아닌 국내 시장에 맞춘 잡지는 1995년 재우미디어의 PC 챔프였다. 오 연구가는 “해당 잡지가 국내 게임 개발에서 굉장히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라며, “이후 100K게임 공모전, 하이텔 게임제작 동호회, 제우미디어 아마추어 게임 콘테스트 등이 시작되며 국내 아마추어 게임문화가 전성기를 이뤘다”고 말했다.

이는 2000년대 초까지 정보통신부 장관배 게임제작대회, 한게임 게임 공모전, 성균관대학교 게임 개발 경진대회 등으로 확산되며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으나, 2005년 한국 게임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인 ‘바다 이야기’ 사건이 터지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바다 이야기’ 사건으로 게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커졌고, 게임물 등급 위원회가 발족되어 아마추어 게임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오 연구가는 “새로 생긴 게임에 대한 법률은 아마추어 게임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며, “게임에 대한 지원이 개발, 문화 쪽 모두 크게 위축됐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때부터 발전하던 국내 게임산업은 쇠퇴기를 맞았고, 각종 커뮤니티와 공모전에 대한 데이터들소실됐다. 관련 사이트를 통제하고 삭제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오 연구가는 전했다.

결론적으로 국내 게임 산업이 자리를 잡긴 했지만, 그 기반이 됐던 아마추어 게임문화는 거의 사라져갔다. 그럼에도 그 ‘불씨’는 살아있어, 2014년 아웃오브인덱스, 2015년 부산 인디커넥트 페스티벌 등 여러 인디 게임 경진 대회가 열리고 있는 추세다.

오 연구가는 “국내 게임산업이 족보는 없지만 계보는 있다. 계보를 찾는 작업을 하고 싶다”며, “아마추어 게임 개발자 생태계는 오래됐고, 현 게임사 생태계의 밑바탕이 됐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국내 아마추어 게임문화는 밟아도 밟아도 자라나기에, 이들이 자라날 수 있게 힘을 보탰으면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강연의 막바지. 오 연구가는 “NDC의 키노트 강연에서 ‘옛날 이야기를 남겨 다음 세대의 토양을 만들고, 점을 이어 미래로 선을 이어나가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현재는 점은 있으나 선을 그을 근거가 부족한 상태다. 게임 개발의 시행착오, 경험, 정리 등을 통해 한국 게임의 역사를 남겼으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현재 오 연구가는 여전히 국내 게임 역사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다. 추후에는 시스템을 구축해 자료들을 검색하고 링크까지 탈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게임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